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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원 Dec 31. 2022

'숫고개' 아주매

휴대폰에 찍혀있는 온도는 영하 17°C.

밤새 내린 눈은 검은 아스팔트 바닥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눈길 운행 후의 기사휴게실에는 버스 기사들의 빙판길과 관련된 각종 무용담이 넘쳐난다. 그중에는 약간의 과장과 구라가 섞여 있어, 그 재미가 소설 삼국지의 적벽대전 못지않은 구절도 있다.

눈길에 브레이크를 밟자, 버스가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 도로를 가로질러 멈춰 서서, 반대편에서 오던 덤프트럭과 충돌할 뻔한 아찔한 이야기나, '원탑재' 고개 정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는 지저분한 이야기까지....

 

 이번달 증평행 노선의 첫차는 '조천리'를 한 바퀴 돌아, '숫고개'라는 고개를 넘어 증평역으로 가는 코스다.

'도대체 거길 어떻게 넘어가나? 나도 바지에 실례를 해야 하나?'

사실, 지금도 '눈길'과 '고개'라는 단어는 듣기만 하여도 머리가 아찔아찔하다. 이제 괴산의 시골 버스를 몰고 다닌 지가 거의 4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입에서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노선이 바뀌었던 첫날...

청안에서 문방리를 거치고 숫고개를 넘어 증평으로 가는 노선임을 까맣게 잊은 채, 청안에서 바로 증평쪽으로 버스를 몰았다.

증평시내에 다다라 회전 교차로 돌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에 노선표를 확인해보니....

"아뿔싸!"

기억 상실증에 걸렸던 주인공이 병원 침대에서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영화의 반전이 시작되듯이, 콧노래를 부르며 달려왔던 엉뚱한 코스부터, 항상 '숫고개'에서 첫차를 타시던 아주머니까지....

머릿속에 생생한 기억이 살아나면서 반전이 시작되었다.

'헐! 어쩐지 시간이 널널하더라...그나 저나 그 아주머니는 어떻게 하나? 아직도 버스를 기다리고 계실 텐데...'

느긋했던 손과 발이 모터가 붙은 것처럼 빨리 돌기 시작했다. 왔던 길을 되짚어 부지런히 버스를 몰았다. 문제의 '숫고개' 승강장에 다다랐을 때, 아직도 버스를 기다리는 아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을 보니 정확히 7분 초과....

그리고 아주머니가 버스에 승차했다. 아무 말씀 없이...


오늘 숫고개에 쌓여있는 눈도, 그날 시골버스를 아무 말 없이 늦게까지 기다려준 아주머니를 등한시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눈이 하얗게 싸인 '숫고개'를 넘자니 오금이 저리고, 시골 버스 기사를 기다려준 아주머니를 버리자니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뱅글뱅글 돌았다.

다음 노선의 배차시간이 허락하는 선에서 '숫고개'를 넘지 않고 그 아주머니를 픽업할 수 있도록 머리를 짜내었다.

시골버스기사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그 아주머니를 무사히 버스에 태울 수 있었다.

" 오늘 제 버스를 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아주머니를 빼놓고 가지 않기 위하여, 사선을 넘어왔습니다. 하하 "

"난, 오늘은 눈이 많이 와서, 버스가 안 오는지 알았는데.... 너무 고마워요! 호호"


증평에 있는 회사에 다니신다고 했는데, 그 회사는 60세가 되면 가차 없이 퇴직을 당한다고 했다.

"그럼 아주머니는 아직 환갑이 안되신 영계네요! "

"호호 그건 아니고요! 회사 건물을 청소하는 계약직이라... 우리 회사는 경비하고, 청소담당만 환갑이 넘어도 다닐 수 있어요! 어디 환갑 넘어 다닐 수 있는 회사가 많이 있나요! "

그래서 잘리지 않으려면, 결근은 꿈도 꾸지 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렇게 눈길을 뚫고 자신을 데리러 와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하신다. 괜히, 시골 버스 기사는 어깨가 으쓱해짐을 느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신을 인정해줄 때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고래가 사람들의 칭찬소리를 이해할 수 있는지는 증명되지 않았지만, 고래를 춤추게 한다고 하는데...

아주머니의 진정한 고마움의 표시는 시골 버스 기사를 춤추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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