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다. 혼자 집안에 틀어박혀 있을 때의 숨 막히는 적막함과는 다른, 산뜻하면서도 호젓한 홀가분함이다. 찌뿌듯하고 여기저기 쑤시던 몸이 가뿐해지고 먹구름이 낀 것처럼 흐리멍덩한 정신이 맑아진다. 음, 이상하다. 예전에 등산했을 땐 이렇게까지 상쾌하거나 개운한 적이 없었는데. 이것이 순감이와 담희 누나가 말한 포스 혹은 정기의 효과란 말인가. 자리에서 일어나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가 본다. 확실히 발걸음이 가볍다. 걸으면 걸을수록 팔과 다리에 힘이 붙는다. 감각도 한층 진해지고 깊어졌다. 나무와 하늘의 푸름이 그윽하고 다채롭게 펼쳐지고, 싱그러우면서도 담백한 산 내음이 전보다 짙게 스며든다.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작은 새의 날갯짓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이 나무를 스치는 소리 같기도 한데, 묘하게 마음을 끌어당긴다. 소리의 진원지라 여겨지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얼추 백여 걸음쯤 걸었을 때 소리가 점차 약해지더니 그만 멎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급작스레 예민해진 감각이 빚어낸 착오이거나 환청일지도 모른다. 소리를 쫓으려는 마음을 접고 눈을 떴다. 그제야 다시 들린다. 저기다, 저 앞의 나무에서 나고 있다. 하늘을 향해 곧게 솟아 있는, 윤기가 나는 초록 잎이 무성한, 그리고 힘차게 뻗은 나뭇가지가 꺾인……? 어, 부러진 나뭇가지. 무언가 발에 차인다. 소주병이다. 옆에 누렇게 찌든 담배꽁초도 보인다. 맞다, 그 나무다. 나를 저세상에 보내주려다 꺾여 버린, 자신의 몸을 분질러 나를 이 세상에 다시 던진 그 나무가 틀림없다.
멍하니 나무를 바라본다. 희한하게도 그날 밤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꿈에 나올 만큼 생생했고 오늘 아침에도 그때의 감정과 흥분이 넘쳐흘러 꽤나 망설였는데, 지금 이 순간 머릿속이 백지처럼 새하얗다.
“어때, 좋지? 거 봐, 내가 오면 좋을 거라 했잖아. 어, 여기 있었네. 더 가야 나올 줄 알았는데.”
담희 누나다. 누가 오는 줄도 모를 정도로 넋이 나가 있었나 보다.
“우리 언니, 그동안 잘 있었어? 미안, 내가 요새 소홀했지?”
언니? 이 나무를 보고? 내가 똑바로 들은 건가 귀를 의심한다. 혼란스럽다. 이 나무를 마주치게 된 우연도, 담희 누나가 마치 살아있는 사람인 양 나무를 대하는 모습도.
“이 나무 굉장하지? 어디 굽은 데 없이 줄기와 가지가 쭉쭉 뻗어 있잖아. 껍질은 얼마나 부드러운지 아기 피부처럼 보들보들하고, 잎은 윤기가 잘잘 흐르다 못해 빛이 난다니까. 그뿐만이 아냐. 여느 나무와는 차원이 다른 맑고 쾌활한 기를 뿜어낸다? 너도 느껴봐. 어때, 장난 아니지?”
이미 인지한 바이긴 한데 다른 나무들에 비해 태가 다르긴 하다. 무언가 범상치 않은 영험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내가 들었던 소리도 환청이 아니라 나무가 발산한 기의 일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누나는 왜 이 나무를 언니라 부르는 걸까?
“이 나무, 나랑 정말 친했던 언니 아빠가 언니 태어날 때 심은 거야. 어떤 용한 스님이 이 산에 나무 심으면 언니가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 그랬대. 더없이 맑고 깨끗한 기운으로 세상을 밝히는…….”
누나의 표정이 변한다. 평소 넘치던 생기가 사그라들고 뿌연 흙먼지가 덧씌워진 것처럼 낯빛이 흐려진다. 만들어지다 만 허수아비 같은 자세로 멍하니 나무를 보고 있다. 좀 전에 나를 불렀던 소리가 들린다. 아스라하고 어렴풋하게 맴도는 듯하다가 힘차고 또렷하게 울려 퍼진다. 누나가 움찔하며 나무에 손을 갖다 댄다. 서서히 누나의 눈동자에 힘이 실리고 얼굴에 화색이 돈다.
“오랜만에 언니 기나 받아 가야겠다.”
누나가 나무를 끌어안는다. 너무나 그리워했던 이와 재회한 것처럼, 혹은 나무와 한 몸이 되려는 것처럼 온 힘을 다해 끌어안는다. 아예 두 다리를 들어 나무를 감고 매달리기까지 한다. 누나는 힘든 자세로 꽤 오래 버텼다. 포옹을 끝낸 뒤에는 나보고도 자기처럼 해보라고 했다. 아무래도 꺼림칙해 거부했지만, 누나는 억지로 내 팔을 잡아끌어 나무를 안게 했다. 다리까지 감아보라 하는데 거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어때? 좋은 기운이 마구 들어오지?”
글쎄, 별 기운은……. 찜찜하다. 미안한 생각도 들고.
“너도 일이 잘 안 풀리고 힘들면 여기 와. 언니 이렇게 안고 있으면 절로 기운이 난다. 이 언니, 사람이 좋아 기운을 마구 나눠준다고.”
다시 한번 나무를 찬찬히 뜯어본다. 가지가 부러진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언니, 나 또 올게. 금방 또 올 거야. 타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어. 잘 안되긴 하지만 그래도 노력하고 있어…….”
하산할 때 우리는 길을 잃었다. 담희 누나는 “어, 이상하다. 이 길이 맞나?”를 수차례 되뇌더니만 여기가 어딘지, 우리가 어디쯤 왔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누나 왈, 산의 정기를 듬뿍 받았더니 올라올 때와는 산이 완전히 다르게 보여 그렇단다. 보다 못한 헌구가 호기롭게 나섰다가 얼마 가지 못해 포기했다. 이 녀석도 담희 누나처럼 산이 달라졌다며 자신의 눈과 방향 감각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했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 세 인간은 그저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기만 할 뿐, 의견을 내거나 나서지 않았다. 낙오되지 않으려고 구응이 꽁무니 쫓아가기에 급급했으니 산의 정기를 받아 감각이 예민해졌는지, 활발해졌는지 알 리가 있나.
일단 잠시 쉬면서 대책을 강구해 보기로 하는데, 담희 누나가 가방을 열어 슬그머니 타로 카드를 꺼냈다. 내가 설마 하는 마음에 그걸로 길을 찾을 거냐고 묻자, 누나는 정기를 받아 영감이 넘치니 카드가 길을 안내해 줄 거라 씩씩하게 대답했다. 카드를 뽑아 길을 점지 받겠다는 허무맹랑한 생각보다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든 건 다른 녀석들의 태도였다. 순감이와 유공이는 물론, 똘똘하다 생각했던 헌구마저 지금 상황에선 어쩔 수 없다며 한번 믿어 보자고 누나 편을 들었다. 아니, 이런 상황일수록 더더욱 카드 점 같은 요행에 기대선 안 되지 않나? 하지만 나라고 이 상황을 헤쳐 나갈 뾰족한 수가 없으니 다수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다. 구응이까지 자기 주인을 믿고 따르라는 식으로 날 보고 짖어대는데 별 수 있나.
첫 번째 카드로 물고기가 새겨진 갑옷을 입고 강가를 지나는 기사가 나왔다. 담희 누나는 때마침 근처에서 흐르고 있는 작은 도랑을 가리키며 이 물길을 따라가자고 앞장섰다. 도랑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민망한 가늘고 얕은 물줄기임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카드와 연관시켜 이정표로 삼았다.
도랑이 사라진 뒤 뽑은 카드에는 하얀 옷을 입고 화관을 쓴 여인이 사자를 쓰다듬고 있다. 누나는 이번엔 순감이의 사차원적 발상을 뛰어넘는 황당무계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산에 있는 바위들이 사자나 여인과 닮았다고 뚫어져라 바위를 관찰하며 우리를 또 다른 길로 인도했다. 별로 닮아 보이지도 않건만 나를 제외한 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누나의 뒤를 따랐다.
이쯤에서 나도 스스로를 옥죄는 어리석은 사유는 버리고, 우리를 둘러싼 직관적 흐름에 운명을 맡기기로 했다. 다음 카드에는 칼을 든 왕이 옥좌에 앉아 있다. 누나는 왕이나 다른 부분은 무시하고 옥좌에 새겨진 나비에 주목했다. 아무래도 산에 있으니 나비가 눈에 들어왔겠지. 한데 눈을 씻고 둘러봐도 나비가 보이지 않았다. 누나는 불안해하는 기색 없이 가만히 눈을 감고서 호흡을 골랐다. 대략 일 분 정도 꼼짝 않고 그렇게 있다가 눈을 떴을 때, 어디선가 나비가 나타나 우리 앞에서 날갯짓을 했다. “저 나비 따라가자. 놓치면 안 돼!” 누나의 외침과 함께 우리는 나비가 시야에서 사라질라 열심히 뒤를 쫓았다. 꽤 많은 거리를 이동하고 다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무렵, 나비는 우리에게 잘 가라고 인사하듯 하늘로 사라졌다.
누나는 이제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힘내자며 다시 카드를 뽑았다. 늑대와 개가 달을 보고 으르렁거리는 카드다. 누나는 망설임 없이 구응이를 불렀고, 구응이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훌쩍 뛰어나와 잰걸음으로 앞장을 섰다. 땅에 코를 댄 채 킁킁거리기도 하고, 먼 산을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우기도 하면서 구응이는 선두가 되어 우리를 이끌었다. 그렇게 종종걸음과 뒤돌아보기를 번갈아 하며 길 잃은 중생들을 인도하다가, 구응이가 누나에게 달려와 캉캉 짖었다. 어라, 멀지 않은 곳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고라니나 멧돼지 소리는 아니고 사람이 내는 소리 같다. 좀 더 소리를 따라가 보니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줄줄이 산을 내려가는 아저씨, 아줌마 무리가 보였다.
아니, 이럴 수가. 진짜 길을 찾아버렸다. 이딴 터무니없는 방법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왔다면 억지 전개라고 쌍욕을 먹었을 방법이 통했다. 누나가 내 등을 치며 손으로 V자를 그렸다. 순감이가 풀린 다리로 비틀거리다 말고 누나의 손을 잡으며 감격해했다. 유공이도 그런 신기를 보유하고 있는 줄 몰랐다며 두 손을 모아 누나에게 머리를 숙였다. 누나는 멤버들의 칭찬을 흐뭇하게 듣고 있다가 산 위쪽 어딘가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게 다 산의 정기를 받은 덕분이라고, 자연의 신비한 힘이 우리를 이끌어 준 거라고 겸손해했다. 한 움큼의 간식을 상으로 받은 구응이만 의기양양해 했다.
무사히 산을 내려오고 헤어지는 자리에서 누나와 순감이는 앞으로 더 자주 산행을 기획할 거라 선언했다. 일주일에 한 번, 아니 시간이 날 때마다 산에 가 정기를 받을 거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밥 먹을 때 둘이서 은밀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더니만 그런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나 보다. 나와 헌구, 유공이가 과하다고 반대 의사를 표했지만 둘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영상을 제작할 수 있을까 연구하고 고민해야지, 시도 때도 없이 산에 올라 힘을 빼고 시간을 낭비하겠다니. 크리에이터 소속사가 아니라 등산 동호회나 사이비 종교 모임이 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