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커튼 위로 햇빛이 비친다. 하얀 천장에 반사된 빛이 잔잔한 물결처럼 일렁인다. 여기가 어디지. 잠들기 전에 누워 있던 곳은 아닌데.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지도 않고 떠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요하고 한적하다. 팔에 링거 주사가 꽂혀 있고 환자복을 입은 걸로 보아 병원은 맞는 것 같은데.
몸 상태는 나쁘지 않다. 목이 약간 마르고 배가 좀 고프긴 하나 잠들기 전처럼 견디기 힘들 정도는 아니다. 집 나간 듯 가물가물하던 정신도 차츰 또렷해진다. 몸을 일으키고 지난 일을 떠올려 보았다. 강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친 데는 없겠지? 주인을 찾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그러고 보니 오토바이에 타고 있던 놈은 곱게 물러갔을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난리법석을 떨었던 거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는 와중에 아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보호자 침대에 누군가 누워 있다. 어제 나를 간호해 주던 그 여자 같다. 저 사람은 왜 날 돌봐주는 거지?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 일어났네요. 좋은 아침이죠?”
여자가 일어나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병원에 데려다주고 간호해 줘서 고맙다고 감사를 표했다.
“고맙다고 해야 할 사람은 저죠. 음……, 사실 그쪽이 구한 강아지가 제 반려견이거든요. 산책하다 물건 줍는다고 잠깐 목줄을 놓쳤는데 구응이 요놈이 갑자기 튀어 나가 가지고. 뭐, 어쨌든 덕분에 이런 인연을 쌓게 되었잖아요, 하하. 그쪽 입장에서도 나쁜 건 아닐 거예요. 아, 이게 아니지. 아, 아무튼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건 인연이에요. 암요, 엄청난 인연이죠.”
여자는 머리카락을 꼬며 횡설수설했다. 어쨌든 여자가 그 강아지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알게 됐다. 그리고 강아지가 무사하다는 사실도.
“의사 선생님이 깨어나면 퇴원해도 괜찮다고 하셨거든요. 특별히 몸에 이상은 없다고. 어때요? 퇴원해도 되겠어요?”
무어라 대답을 하기 전에 배가 먼저 꼬르륵거린다. 조용한 병실에 다 울려 퍼질 만큼 요란한 소리다. 그렇게 배가 고프지는 않지만 따지고 보면 꽤 굶긴 했다. 사실 얼마나 굶었는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아, 배가 고프신가 보네. 근데 이거 어쩌죠? 병원에서 나온 밥은 제가 돌려보냈거든요. 병원 밥은 맛도 없고 너무 곤히 자길래 깨우질 못하겠어서. 얼른 내려가서 먹을 거 사가지고 올게요. 아무래도 죽이 좋겠죠?”
내가 괜찮다며 말렸지만 여자는 얼른 가방을 들고 병실을 나갔다. 복도를 급하게 달려가는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혼자가 된 병실에서 얼룩 하나 없는 하얀 천장을 우두커니 쳐다본다. 2인실인데 환자가 나 혼자다 보니 유독 더 적막한 느낌이 든다. 병원에서 나가면 뭐 하지? 언제쯤 다시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까? 다음번엔 잘 해낼 수 있을까? 참, 잠들기 전에 여자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거라 하지 않았나? 자살 성공을 목표 달성이라 할 수 있나? 그나저나 여자는 왜 그런 이상한 카드를 가지고 있지? 놀이에 쓰이는 트럼프 카드는 아니던데. 이런저런 공상과 망상 사이를 한가로이 오가는 사이 여자가 한 손에 작은 종이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요.”
죽이 말갛지 않고 벌겋다. 낙지 김치죽이란다. 나름 영양실조 환자임을 고려해 사 온 거라 하는데 낙지도 김치도 영 삼키기가 쉽지 않다. 씹고 또 씹고 한참을 오물거린 다음에야 뱃속으로 넘길 수 있었다. 여자는 내가 먹는 모습에 개의치 않고 자기소개를 했다. 이름은 ‘구담희’고 나이는 서른세 살이란다. 나보다 어릴 줄 알았는데 무려 세 살이나 많다. 나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고 지금은 하던 일을 관두고 다른 일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여자는 내 나이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많아서 그렇다는데 아마 그 반대겠지. 거짓말이 서툴러 보이는 타입이다. 어쨌든 자기가 연장자이니 이제부터 말을 놓겠다고 한다.
소개가 끝나자 여자는, 아니 담희 누나는 가방에서 어제의 카드 더미를 또 집어 들었다. 이번에도 엉성하게 셔플을 하더니 침대에 펼쳐 놓고 세 장을 뽑아보라고 주문했다. 내가 무슨 카드냐고 묻자 놀란 표정을 짓더니만, “타로잖아. 이거 몰라?”라고 반문했다.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이 카드는 우주와 인간의 심오한 원리를 담고 있는 신비한 물건이야. 78장의 카드 안에 긴 세월에 걸쳐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온 인류의 지혜가 축적되어 있지. 우리는 이 카드를 통해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그 변화에 대해, 그리고 자체적으로 작은 우주를 이루며 큰 우주와 공명하는 우리 자신에 대해 알 수 있어. 자, 스스로의 마음에 집중하면서 세 장 뽑아봐.”
사이비 종교 모임에서나 들을 법만 한 설명은 한 귀로 흘려버리고 시키는 대로 세 장을 뽑았다. 회색 망토를 입고 있는 노인이 그려진 카드, 물고기가 담긴 커다란 잔을 들고 있는 젊은이가 그려진 카드, 눈을 가린 채 양손에 검을 들고 있는 여인이 그려진 카드를 뽑았는데 누나의 표정이 밝지 않다. 누나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았다가 발끝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어제처럼 카드를 더미에 섞어 버리려는 자세를 취하다가 내 눈치를 보고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못해 카드를 하나씩 들고 설명을 해주는데 요점이 잡히지 않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누나는 결국 설명을 멈추고 지금은 병원의 좋지 않은 기운 때문에 카드 리딩이 어려우니 나중에 다시 해보자며 카드를 재빨리 가방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