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유죄추정의 원칙 (2/5)

⁋이게 소설이라고?... 16

by 둘리아빠


회사의 징계 사실은 아내에게만 알렸다. 아직 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아들과 딸에게는 비밀로 했다. 아내로부터 한동안 잔소리를 들었다. 징계를 받았다는 것보다 그로 인해 급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게 아내를 더 화나게 만들었을 터였다. 징계 기간에는 회사에 나갈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아침에 출근 차림으로 집을 나왔다. 아이들 눈을 속여야 했다. 처음 며칠간은 도서관에서 소일했지만 이내 시들해졌다. 그러다가 발견한 게 이 커피숍이었다.


시내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체인점이 산재해 있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번갈아 이용했다. 오전에는 서쪽에 있는 가게에 들렀다가 오후에는 동쪽으로 옮겨오는 식이었다. 그 과정에서 도청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는 곽을 만났다. 나보다 서너 살 위로 짐작되는 곽도 나처럼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 오전에는 따로 시간을 보내다 오후에 장소를 정해 만나서 함께 어울렸다. 둘은 음료를 시켜 놓고 각자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드라마나 영화를 보았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대화’를 주고받았다. 남들 눈에는 중요한 사업이라도 의논하는 사람들처럼 사뭇 진지하면서도 열정적인 모습으로.


- 곽 형은 집에서 쓰레기 분리수거를 해본 적이 있으시죠?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노트북에 시선을 준 채 마우스 위에서 집게손가락을 까닥거리던 곽이 나를 바라보았다.

- 당연하죠. 저녁 설거지와 분리수거는 제 담당입니다. 왜요?

- 아, 우리 집도 쓰레기는 제가 버립니다만 한 가지 애매한 부분이 있어서….

- 뭔데요?

- 일회용 나무젓가락 있잖습니까? 그건 어느 쪽으로 분류해야 할까요?

- 나무젓가락도 재활용 가능한가요? 그건… 종량제 봉투를 이용해서 버려야 하지 않나요?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제 아내가 종이로 분류하라고 막무가내로 우기는 바람에 참 난감합니다.

- 종이라고요? 페이퍼? 아니, 왜요?

- 아내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종이는 나무로 만들어진다, 나무젓가락도 나무를 원료로 만든다, 따라서 종이와 나무젓가락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므로 나무젓가락은 종이로 분류되어야 한다, 는 것입니다.

- ….

- 제 아내 주장에 동의하십니까? 듣고 보면 그럴듯하기도 한데, 뭔가 영 어색한 느낌이 들어서요. 그런 논리라면, 부러진 목제 책상 다리를 종이 분류함에 넣어도 된다는 말이잖아요.

- 잠깐만요, 생각 좀 해봅시다. 음, 김 형 사모님의 논리에는 언뜻 빈틈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목적론적 관점에서 한 번 따져봅시다. 애당초 분리수거를 왜 하게 된 겁니까?

- 그거야 재활용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그러면 쓰레기량도 당연히 줄어들 거구요.

- 그렇죠? 그렇다면 나무젓가락을 재활용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재질이 종이라면 재가공 과정을 거쳐서 다시 종이를 만들 수 있는데, 나무젓가락도 그렇게 종이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 어렵…겠, 죠?

-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나무젓가락만 따로 모아서 공장으로 보내면 종이를 만들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런 과정이 복잡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재활용을 위한 분리수거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죠. 그럴 바에는 아예 태우거나 매립해 버리는 게 경제적으로 이득이 됩니다.

- 유익한 설명이네요. 설득력도 있고요. 역시, 곽 형의 분석력은 탁월합니다. 번번이 감탄을 금치 못하겠네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커피숍과 허리 높이의 경계석으로 구획된 서쪽은 야적장이었다. 목재와 철물, 단열재, 파이프 들이 어수선하게 쌓여 있었다. 그 너머로는 비닐하우스 무리와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형상의 야트막한 산이 이어졌다. 시내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 이런 규모의 커피숍을 차린다는 게 무모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주말에는 가족 단위 손님들로 미어터질 정도라고 했다.

세상에는 나그네쥐들만 있는 게 아니라,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겁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람들도 많은 듯했다. 하긴 리스크가 두려워 몸을 사린다면 반전이라곤 없는 지루하고 따분한 인생을 받아들여야 할 터였다. 지금껏 내가 살아온 것처럼.


야적장 한 구석에서 희끄무레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폐자재를 소각하는 모양이었다. 연기는 창고 지붕 언저리에서 하늘거리다 바람의 행로를 따라 시내 쪽으로 몰려갔다. 갑자기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내 의식의 거름종이를 우회한 질문이었다.


- 곽 형은 최근에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걸 본 적이 있나요?

- 아니요. 본 적이 없는데요. 그리고 요새는 굴뚝 보기도 힘들잖….

무심코 내 질문을 따라가던 곽의 표정이, 시장에 생선 좌판을 벌인 아줌마 주머니에서 나온 꾸깃꾸깃한 지폐처럼 흉하게 일그러졌다. 열이 나는지 낯빛까지 불그스레해졌다. 곽이 입아귀를 실룩거리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김 형, 혹시 제 얘기를 빗대어 하시는 겁니까?

- 무슨 말씀인지…?

아차, 싶었다. 곽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터였다. 말이란 하는 사람의 의도보다는 듣는 사람의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을 깜빡했다. 당황한 나는 두 손을 과장스럽게 휘저으며 변명을 해댔다.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키면서.

- 아, 절대 아닙니다. 저 연기를 보니 갑자기 우리 큰형님 생각이 나서요. 지금 환갑이신데, 시골에서 자랄 때 겨울이면 아궁이에 불 때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더군요.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연기가 굴뚝으로 빠져나온다는데 그 생각을 하다가 그만….

야적장의 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곽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우는 듯 웃는 듯 애매한 표정이 맴돌고 있었다.


공무원인 곽도 나처럼 출근을 못하고 있었다. 이웃 주민을 성추행해 품위 유지 의무를 어겼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경찰 수사는 아직 진행 중이었고 범죄 혐의는 확정되지 않았다. 서너 번의 만남이 지난 후 곽이 마지못해 풀어놓은 이야기는 엉뚱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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