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유죄추정의 원칙 (3/5)

⁋이게 소설이라고?... 17

by 둘리아빠

곽은 시내 외곽의, 지은 지 삼십 년이 된 아파트에 살았다. 조만간 재개발이 이루어질 거라고 했지만 소문만 난무했다. 곽은 그 아파트 6층 25평형에서 아내와 아들 둘이랑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사무실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술이 만취한 상태로 곽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타고 있었다. 몇 층에 사는 아가씨인지 얼굴이 낯설었다. 물론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3층쯤에서 갑자기 덜컹하며 멈췄다. 천장 조명도 꺼졌다. 정전이 된 듯했다. 전기설비가 오래된 탓에 가끔 아파트 구내 정전이 발생해 주민들이 불편을 겪곤 했었다. 아가씨가 비상 호출 벨을 누르는 것 같았다. 곽은 구석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느긋하게 기다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곳에서 움직이다 아가씨에게 괜한 오해를 살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관리사무소에 연락한 아가씨는 휴대전화 플래시를 켠 채 곽의 대각선 위치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5분쯤 지나자 전기가 들어왔고 엘리베이터는 다시 움직였다. 곽이 기억하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 그런데 일주일 후에 경찰서에서 조사받으러 나오랍디다. 그때 엘리베이터 안에 같이 있던 아가씨가 나를 신고했다는 겁니다. 어둠 속에서 자기 몸을 더듬으려 했다며. 그러니까 내가 성추행을 했다는 거죠.

- 세상에!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 저도 황당했죠.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그러더군요. 그때 술을 많이 마셨다는데 전부 기억할 수 있느냐는 거죠. 솔직히 술에 취하면 필름이 끊길 때도 있어요. 그래서 사실대로 이야기했습니다. 가끔씩 그런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때는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다고. 그랬더니 경찰이 되물어요. 그날 아가씨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기억나느냐고요. 기억날 리가 없죠. 만나고 당장 뒤돌아서도 가물거릴 판에 일주일 전에 만난 여자의 옷차림을 기억할 수 있겠어요? 경찰이 화를 내면서 말합디다. 그것 봐라, 당신이 그날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인사불성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당신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무슨 행동을 했을지 어떻게 아느냐고 말입니다. 아가씨가 무슨 억하심정으로 당신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하겠냐는 말도 했어요. 피해 진술이 매우 구체적이고 일관성이 있다면서요.

- 아가씨는 만나보았습니까?

- 경찰서에서 만났지만 울기만 해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저씨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면서. 그거 참 팔짝 뛸 만큼 환장하겠더군요.

- 엘리베이터 안에 CCTV는 없었습니까?

- 있기는 하지만 정전되면 그것도 꺼져 버린다네요.

- 그럴 테지요. 난감했겠군요.

- 죄질이 나쁘다고 경찰에서 사무실에 통보했나 봅니다. 그래서 직위 해제되었어요. 수사 결과가 나오면 정식으로 징계 절차를 밟겠죠. 가족들은 아직 모릅니다. 아가씨와 합의가 안 된다면 아파트에도 소문이 퍼질 겁니다. 당연히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 테고요.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인데요?

-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대응하는 수밖에.


곽은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매복에 걸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포로 신세가 된 병사처럼 무기력해 보였다. 곽의 답답한 사정을 듣고 나서 나는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일반적으로 범죄 혐의자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일단 무죄로 간주된다. 하지만 성관련 범죄에서는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측의 진술이나 개연성만 있어도 죄인 취급을 받는 모양이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은데도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을 처벌한 사례들도 있었다. 한마디로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랴.’는 고전적인 속담이 통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 곽이 정색해서 발끈한 이유였다.


곽은 선생님에게 꾸중을 들은 아이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채 소파에 깊숙이 파묻혀 있었다. 속이 부실한 헝겊 인형마냥 힘이 없고 축 처진 모습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커피를 추가 주문하겠다고 했지만, 곽은 반쯤 남은 자신의 머그잔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애잔한 생각이 들어 딴에는 재미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지껄여보았다. 하지만 이미 닫혀버린 곽의 마음을 돌려세울 수는 없었다. 오후 다섯 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널려 있던 노트북과 책들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 곽 형, 많이 삐치셨구나. 나갑시다. 아직 저녁은 멀었지만 사죄하는 뜻으로 제가 술 한잔 사겠습니다. 장 씨 아저씨도 부르고.


대학병원 근처 삼거리 한편에 있는 순댓국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막창과 순대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의 허름한 겉모습과는 달리 순댓국과 막창국밥 맛이 깔끔하다고 소문났다. 인공 조미료를 쓰지 않고 푹 삶은 사골 육수만 사용해서 국물을 만든다고 했다. 값도 저렴해 호주머니 부담도 덜했다.


이른 시간이라 식당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돼지막창이 푸짐하게 들어간 막창국밥과 순대, 소주를 시켰다. 침울한 기분을 완전히 삭이지 못한 듯, 곽의 표정은 어스름 무렵의 공원묘지처럼 칙칙하고 어두웠다. 둘이 아무런 말도 없이 자작하며 서너 잔을 비웠을 때 장 씨가 들어왔다. 그의 집은 식당에서 별로 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곽이랑 내가 살고 있는 집도 여기서 10여 분 걸음에 있었다.


나보다 열 살쯤 많은 장 씨를 처음 만난 곳도 이 식당이다. 오늘처럼 곽이랑 둘이 소주를 곁들인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장 씨는 구석진 자리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헐렁한 면바지에 변색된 회색 점퍼를 걸친 후줄근한 인상이었다. 정수리까지 벗어진 머리, 덥수룩하고 손질 안 된 수염, 주름살 자글자글한 이마가, 시내버스 경로석에 앉아 있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만큼 나이 들어 보이게 했다. 얼마간 곁눈질하며 장 씨의 술 마시는 모습을 훔쳐보던 곽이 합석을 제안했다. 마다하던 장 씨가 거듭된 곽의 요청에 우리 자리로 옮겨왔다.


곽은 나중에, 그날 장 씨가 곧 자살할 사람처럼 보였다고 내게 말했다.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냥 직감이라고 했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직감. 곽도 언젠가 자살을 꿈꾼 적이 있다는 말처럼 들렸지만 더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 후로 셋은 일주일에 한 번꼴로 이 식당에서 만나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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