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소설이라고?... 24
K의 아내는 딸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후에도 한동안 휴대전화를 손에 든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내 관련 데이터들로 추정해 보면, 그녀는 K가 사라져도 당장 아쉬운 게 없을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퇴직하면 가장으로서의 경제적 효용이 끝날 게 분명한 K의 존재는 그녀에게 거추장스러울 듯했다. 어차피 올해 말 퇴직할 때까지 K의 월급은 그녀가 관리하는 통장으로 들어올 터였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도 그녀 명의로 되어 있고, K 몰래 관리 중인 주식과 적금도 꽤 됐다. 거기다가 가끔 스킨십이 필요할 때 부르면 달려오는 남자까지 있었다. 아파트 등산 동호회에서 알게 된 사십 대 후반 이혼남이었다. 일 년 전부터 한 달에 한 번꼴로 만나는 눈치였다.
머그잔에 커피를 담아 다시 소파로 돌아온 아내는, 무릎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K가 퇴직하면 받게 될 연금에 대해서 검색했다. 퇴직연금 계산 프로그램을 찾아 예상 금액을 알아보려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보수액이니 호봉이니 하는, 그녀가 알 수 없는 항목들을 입력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저기 블로그를 돌아다니며, 매월 받는 연금이 조금 줄어들기는 하지만 조기에 수령할 수도 있다는 것, K가 사망하면 연금액이 확 줄어든다는 것, K가 사망하기 전에 일시금으로 받는 게 그녀에게 유리하다는 내용들을 알아냈다.
제 방에 틀어박혀 게임에 빠져 있는 아들도 아빠의 연금에 눈독을 들이는 모양이었다. 아빠가 끝내 나타나지 않으면 연금은 누가 받게 되는지 궁금한 듯, 아들은 포털 사이트에 퇴직연금, 실종, 사망, 상속, 같은 키워드들을 입력했다. 검색된 자료를 통해 퇴직연금은 배우자나 미성년 직계비속만 상속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장애가 없는 자신은 넘볼 수 없으며, 엄마에게 모두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아빠가 실종되더라도 5년 동안은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유산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사실도 찾아냈다. 벌겋게 달아오른 아들의 얼굴이 롤러에 걸렸다가 나온 복사지처럼 흉하게 일그러지는 게 노트북 카메라에 잡혔다.
K가 아파트에서 사라진 지 한 달이 지나갔다. 그 사이 아내는 자신이 모르는 K 명의의 부동산과 금융자산 같은 게 있는지 찾아보았다. 남자 친구를 불러내어 저녁을 먹고 모텔에 다녀오기도 했다. 아들은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아빠 책상 서랍이나 책장들을 샅샅이 뒤졌지만 통장을 찾지는 못했다. 딸은 남편에게 아빠가 실종 처리되면 유산 상속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고, 사위는 처남이 검색했던 경로와 유사하게 인터넷을 뒤져 연금이나 유산 상속 관계를 아내에게 알려줬다.
내가 보기에 가족들에게 K의 행방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단지 K의 부재가 가져다줄 떡고물에만 관심이 있는 듯했다. 가족들이 보여주는 그런 모습들이 일반적인 삶의 행태인지,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가족으로서의 애정과 유대감이 고갈되어 버린, 극히 예외적인 사례일지 몰랐다. 그래도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가족 부양이라는 가부장적 의무를 어깨에 짊어진 채 고단한 행로를 걸어왔을 K를 생각하면, 나는 괜히 울적해졌다.
K의 식구들이 사는 아파트로 마른멸치, 간장게장 등이 담긴 택배가 배달된 것은 K가 사라진 지 두어 달 지난 오월 말께였다. 택배 송장에는 보내는 사람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발송지가 지난번 돈을 송금한 ATM기가 있었던 소읍 부근인 것으로 보아, 그리고 그 지역에 가족들은 아무런 연고가 없다는 것을 감안할 때 K가 보낸 게 아닌지 추정될 뿐이었다.
택배를 받은 얼마 뒤인 일요일 점심때, 가족들이 K의 집 거실에 다시 모였다. 이번에도 메뉴는 갈비찜이었다. 남편이자 아빠이며 장인이기도 한 K의 안녕 여부는 그들의 식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듯했다. 커다란 냄비에 수북이 담겨 있던 갈비찜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식사하는 동안 가족들의 입에서 K는 딱 한 번 소환되었다. 딸이 먼저 ‘고기가 부드러워 아빠도 좋아하실 것 같은데.’라고 말하자, 아내가 ‘저만 살겠다고 가족을 팽개친 양반인데 신경 쓰지 마라.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알아서 기어들어 오겠지’라고 대꾸했다. 갈비찜을 씹느라 아들과 사위는 그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택배가 발송된 소읍을 찾아가서 K를 수소문해 보자고 할 만도 한데,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K가 어딘가에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이 어떤 기분일지 나는 모르겠다. 다만 스마트TV와 인터폰, 휴대전화 등을 통해 확인되는 그들의 표정이나 목소리가 그렇게 밝지는 않다는 것으로 추측만 할 뿐이다. K는 가족들의 이런 태도를 미리 예상했을까. 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족들을 떠난 것일까.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택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가족들에게 상기시키고 있을까. 가족들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을 찾으러 와 달라는 구조신호로? 나는 궁금했지만 센터장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센터에서는 일단 K를 ‘보류’ 카테고리에 분류한다. 유의미한 데이터를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하는 타깃을 처리하는 방법이다. 그렇다고 아주 폐기한 것은 아니다. 비록 방전된 건전지처럼 가족들에게 가장으로서의 역할은 끝난 듯 보이지만, 데이터 원천으로서의 가치는 남아 있다. 데이터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센터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다. K의 죽음이 장례식장 CCTV를 통해, 조위금을 보내는 지인들의 이체 정보를 통해, 장례비용 정산을 위한 카드 결제 기록을 통해, 유족의 사망 신고를 통해, 최종적으로는 국가의 제적 처리를 통해 확인될 때까지 K는 센터의 관리 영역 속에 남아 있어야 한다. 아니, 죽은 후에도 살아남은 자들이 K와 관련하여 생성하고 공유하는 데이터들은 센터에서 귀중한 자원으로 활용될 것이다. 세상이 자본주의 방식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한. <끝>
※ 작품 후반부의 대화 문장에 큰따옴표(“ ”)가 아닌 작은따옴표(‘ ’)처리를 한 것은, 인물들의 직접 대화가 아니라 데이터 과정을 거친 대화임을 표시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 2025년 <제주문학> 가을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원고지 84장 분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