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년의 글쓰기
☞ 법이라는 게 꼭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은 아니야. 법적 판단이 항상 옳은 것만도 아니고. 어쨌든 불완전한 사람이 하는 일이니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어. 자네도 잘 알잖아. 법관들이 판결을 할 때 ‘법과 양심에 따라’ 하는 거. 법이 완벽하다면 왜 굳이 양심이라는 걸 끼워 넣겠어. 법적 판단에 오류가 생기면 권위가 떨어져서 그 효력에 대해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볼 거잖아. 그럴 때 슬쩍 법관의 양심에 책임을 돌리려는 거야. 법은 문제가 없었는데 법관의 양심으로 그런 결정을 했다,라고 변명하는 거야. 양심이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니까 양심에 문제가 있다고 드러내놓고 따지기는 힘들잖아. 법관도 똥을 싸고 남편이나 아내에게 매일 구박당하며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걸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고.
☞ 인간이 모험을 즐기는 게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운명이기 때문이라네. 그래서 번지점프도 하고 상어가 득실거리는 해안에서 서핑도 하고 자동차로 죽음의 레이스를 벌이기도 하지. 그런데 만약에 인간이 영생할 수 있다면 그런 모험을 하지 못할 거래. 그런 일에 목숨을 걸기에는 너무 위험 부담이 크다는 거야. 천 년도 더 살 수 있는데 스무 살쯤에 번지점프를 하다 죽어버리면 아깝다는 거지. 뭔가 좀 이상하지만 말이 되는 소리 아니냐?
☞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 내거나 남들이 만들어 낸 것을 소비하면서 평가하는 것...그는 세상에 뭔가를 만들어 내놓는 데 관심이 없다. 남들이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데도 시간이 부족하다. 그는 그것도 하나의 창조라고 우긴다.
☞ 신을 믿는 자들은, 설령 신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믿는 자들은 그 믿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들에게 가치 있는 것을 희생하는 것으로 그들의 행동에 일관성을 부여한다...나는 그것을 믿어. 그 믿음 때문에 내게는 소중한 것도 아무렇지 않게 희생했어. 그러니 내 믿음은 정당한 거야...종교적이든 일반적인 소속감이든 자신의 믿음이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한 재산이나 시간 등을 희생한다. 그 희생이 클수록 자신의 믿음은 강화된다.
☞ 아버지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고집스러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 괜히 몸 고생 시키기 싫다면서 항암치료를 거부했다. 만신창이가 된 채 사람 구실도 못할 텐데 구차하게 목숨만 연장하는 치료가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가끔 물만 마시고 식사도 하지 않았다. 못 견디게 괴로우면 진통제를 맞았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버티다가 돌아가셨다.
☞ 냉정하게 따지면 지금의 나의 생각이나 행동 등은 내 의지의 산물이 아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를 둘러싼 환경이(사회가) 나에게 주입하고 나를 길들여 온 결과물에 불과하다.
☞ '언론'이라는 게 평소에는 국민의 알 권리 운운하며 세상 시끄럽게 굴지만, 막상 국민이 알고 싶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침묵하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게 숨어버리지. 그러다 잠잠해지면 다시 나타나서 떠들어대기 시작하고. 그들은 그게 비열한 짓이라는 것도 몰라. 원래 그렇게들 살아왔으니까 그러는게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야...그들은 자신을 ‘기자’라고 부르지만 단지 기사를 쓰고 급여를 받는 언론기업 종사자일 뿐이다. 빵을 만들어 주고 월급을 받는 제과점 직원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어. 그런데 사람들에 그들에게만 특별한 정의감이나 사회적 책임감을 요구한다는 것이 그들 입장에서는 억울할 법도 한 일이야.
☞ 볼펜 하나 사러 문구점에 가면 본 적이 있을 거야. 필기구 코너 앞에 낙서장 비슷한 종이가 놓여 있는 것을. 요새는 워낙 필기구 종류가 많으니까 한번 시험해보고 사라는 의미겠지.(옛날에는 달랑 모나미 볼펜이나 싸인펜 정도 였는데). 그런데 그곳에 무심코 자기 이름을 쓰는 사람이 있지. 아니면 자신의 사인을 한다거나. 어릴 때 외웠던 국민교육헌장 첫 구절을 적는 사람도 있더라.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아, 돌이켜보니 어릴 때 나는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민족 중흥을 위한 사명, 말이야. 그것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명이지. 그런데 지금 이 꼴은 뭐지. 민족의 중흥은 고사하고 나 혼자 먹고 살기도 힘드니...
☞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질병이라고 생각하는 타입이다. 외적인 질병. 자신의 몸속에서 자신을 갉아먹는 병균처럼 외부에서 자신을 못살게 구는 질병...그에게 아내는 그런 존재였다. 치료해야 할, 필요하면 노련한 의사의 수술이 필요한 질병. 그런데 아내의 존재가 암과 같은 거라면 굳이 수술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암이란 게 수술을 한다고 완치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치료 과정에서 몸만 더 상할 테니, 그냥 병이랑 같이 살아가는 수밖에...
☞ 살다보면...때로는 어린 아이에게 머리를 숙여야 할 때도 있고, 버스비가 없어 여덟 시간을 걸어야 할 때도 있고, 자신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할 수도 있고, 고속도로를 달리다 연료가 바닥날 수도 있고, 며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일만 해야 할 때도 있고, 재수없이 벼락을 맞을 수도 있고, 비오는 날 막걸리를 먹으면서 예전 첫사랑에게 달달한 연애편지를 쓰고 싶을 때도 있고,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을 우연히 목격할 수도 있고, 술 주정뱅이 남편 몰래 구입한 로또 복권이 당첨될 수도 있고, 힘들여 키워놓은 자식들에게서 가슴을 후벼파는 말을 들을 수도 있고, 치매에 걸려 십 년도 넘게 요양원 신세를 질 수도 있고...살다보면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다.
⁂⁂ 좋은 소설은 설교하지 않는다. 독자를 설득하려고 진을 빼는 작가라면 논픽션을 쓰는 편이 낫다.
- 테리 맥밀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