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년의 글쓰기
☞ 그의 상상력은 때때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오르기도 하지만, 대체로 습기 하나 없는 곳에 오래 처박혀 말라비틀어져 버린 나무젓가락처럼 허술하고 빈약했다...살아가면서 상상력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은 단조롭지만, 한편으로는 편안하고 안락할 터였다. 생각하기 위해 삶의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 그냥 사는 대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복잡한 논리나 거창한 대의명분을 제시할 필요가 없다. 다만 5만 원권 지폐 뭉치를 슬쩍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삶이라는 행로에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돈으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사람이 편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는데 어리석게 그 굴레에 얽매여 헤어나지 못하는 게 돈만은 아닐 것이다.
☞ 가로의 길이가 삼사 미터는 될 것 같은 널찍한 칠판을 가득 채우는 방정식의 풀이 과정을 지루하게 쳐다보는 것...도대체 그게 살아가는 데 무슨 의미가 있다고 저렇게 미친 듯이 숫자와 기호를 나열하고 있을까? 내 삶도 인수분해하듯 가닥가닥 풀어헤치면 방정식 문제처럼 결국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일까? 그 답만 찾아낸다면 ‘1등급의 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라도 줄 수 있다면 혹시 모를 일이지만.
☞ 고양이들은 하루에 16시간 가량 잠을 잔다고? 본능적으로 낮에는 대부분 잠을 자면서 에너지를 보충하고 해가 저물면 움직인다고 한다.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 집의 못생기고 고집 센 냥냥이는 낮에 잠을 자는 것을 난 본 적이 없다. 밤에 내가 잘 때도 자신의 영역을 확인하느라 바퀴벌레처럼 온 집안을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도대체 언제 잠을 자는지 작정하고 지켜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럴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들자마자 포기했다.
☞ 그는 허리께에서 오른손의 주먹을 두어 번 살짝 쥐었다 폈다. 마치 근육을 움직이기 위한 준비운동을 하듯. 이어서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아 손바닥 면적을 최대로 만들더니 관자놀이께까지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어깨를 중심축 삼아 오른팔을 세차게 휘둘러 아내의 얼굴을 후려쳤다. 움직임이 물 흐르듯 부드럽고 간결했다. 손바닥이 미처 중력의 존재를 느낄 새도 없이 빠른 동작이었다. 머리가 휙 꺾이면서 서너 걸음 뒷걸음질치다 무너지는 아내를 무심한 눈길로 바라본다.
☞ 그는 처음에 ‘근로소득’과 ‘불로소득’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돈을 벌려면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단어도 아닌 음절 하나만 바꾸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도 있다는 걸 몰랐다. 불로소득의 존재를 알고 나서는 사람들이 신성하다고 부추기는 ‘노동’이라는 걸 할 마음이 사라졌다.
☞ 그는 가족끼리의 근사한 모임에서 블루스 기타를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다룰 수 있는 악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악보를 읽을 줄도 모른다. 가끔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기는 하지만, 귀로 여러 번 반복해서 듣고 따라 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행이라면 그의 가족들은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것을 챙겨서 모임을 별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예전에 결혼기념일에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 둘을 데리고 가족끼리 오붓하게 레스토랑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끝이 안 좋았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라면 특별히 중요한 일도 아닌 듯싶기는 한데, 어쨌든 아내랑 크게 다투었다. 그릇에 담긴 국물이 바닥에 쏟아지고 접시가 날아다녔다. 결국 레스토랑에서 쫓겨났다. 그날 이후로 아이들은 아빠랑 외식하는 것을 꺼렸다. 그러니 악기를 다룰 줄 안다고 해도 멋지게 연주할 가족 모임이 열릴 일은 당분간 없다는 말씀이다.
☞ 질투는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다. 가능성이라 불리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나도 할 수 있는 일인데, 쟤가 좀 더 잘한다면 질투의 감정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더라도 흉내나 내는 정도인데 상대는 세계 선수권 대회에 나갈 만큼의 특출한 능력을 지녔다면, 굳이 질투하면서 감정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악보조차 읽지 못하고 하모니카도 제대로 불지 못하는 내가 방탄소년단을 질투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 누군가 ‘민중은 개나 돼지’라고 말했다는데, 나 역시 ‘민중’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으니 개나 돼지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개일까, 돼지일까? 그가 어떤 기준으로 둘을 구분하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가능하면 나는 돼지보다는 개 편에 서고 싶다. 이유는 단순하다. 오래 살고 싶기 때문이다. 평균적으로 돼지보다는 개가 오래 살 가능성이 높다. 돼지는 거의 인간의 식탁 위에서 생을 마감하도록 운명 지워졌지만 팔자 좋은 개는 자연사하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다. 제 명대로 살지 못하더라도 부위별로 분해되어 인간의 일용할 양식이 될 가능성이 돼지에 비해 아주 낮다. 돼지가 인간의 식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구제역 같은 전염병에 걸려 집단으로 땅에 묻히는 경우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다. 짐짝처럼 트럭에 실려와 포크레인의 삽날에 찍히며 땅에 생매장되는 고통을 상상할 방법은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육체가 조각조각 해체되는 것보다는 덜 고통스럽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다만 자신들에게 민중을 분류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개의 등급을 가진 사람들을 돼지 등급보다는 그나마 조금 나은 존재로 평가한다는 전제에서 그렇다는 말이다...그런데, 자신을 개 또는 돼지라 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울타리에 함께 살아가는 기분은 어떨까?
☞ 고통은 어느 수준을 넘으면 크기를 따지는 게 무의미해진다. 참을 수 없는 고통보다 정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더 참을 수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 나의 문장 하나가 좋아지는 그만큼 나는 어쨌거나 새로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도무지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 이만교/글쓰기 공작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