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약한 사람이다.
어쩌면 내가 너를 성급하게 밀어내는 이유는 네가 내 삶에서 더 소중해지는 게 두려워서일지도 모른다.
구구절절 설명하기에는 구차한 복잡한 인생사를 거쳐오면서 겨우 마음 둘 곳 하나 생겼다고 처음 느껴보았는데, 너무 의지한 탓인지 조금만 수상한 낌새가 보여도 나는 일상이 뒤흔들리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물론 이유없는 불안은 아니었지만... 상처받는 것을 너무 두려워했다.
그런데 가끔은 이 불안감을 그저 내 탓으로 돌려 자책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건 내가 너를 너무나 사랑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한때 이렇게나 순수하게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자랑스러운 추억을 어여쁜 부분만 고이 간직해 여기저기 내어놓고 싶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때는 내 삶에 대한 가치관이 너무도 확고했고, 내 삶에 그저 나 하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이제는 삶의 중심이 내 안이 아니라 그 사람과 나 한가운데 어디쯤으로 다시 영점이 맞춰진 것 같다.
니가 제 삶을 사느라 나에게 조금만 소홀하거나, 나를 속이고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아가면 나는 니가 움직이는 대로 그 무게중심에 여질없이 이끌려갔다.
그런데 나에게 그렇게 영향을 끼치는 니가 싫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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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사랑하기 전에 밀어내야지, 아니다 싶을 때 끊어내야지 하는 시도가 벌써 두 번째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호기심에 시작한 것 뿐인데' 하는 억울함도 밀려오지만 그래도 지난 날의 추억을 부정하고 싶을 만큼 원망스럽지는 않다.
과거에는 내가 이성에게 상처를 준 적도 있었고, 소위 말해 '나쁜년'같은 역할을 해왔는데, 내가 아무리 못살게 굴고 이랬다저랬다 변덕을 부려도 끝까지 나를 놓고 싶지 않아하던 친구 한 명이 떠오른다.
나는 그 친구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한다. 그 친구가 나를 정말 사랑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알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없으니 보고싶고, 앞으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면 괴롭고, 함께한 사진과 영상에서의 내 모습들이 즐거워보였다면 아마 사랑을 했기 때문 아닐까.
밀어내놓고 바보같이 매일 생각하고, 기껏 상처줘놓고 다시 연락하고싶어서 고민하는 모습들이 사랑이지 않을까..
너를 만날 수 있는 날이 하루라도 더 있길 바라는 마음에 매일 편도 한시간 반씩 출퇴근을 하면서도 토요일과 일요일만이라도 너와 잠드는 순간까지 함께하고 싶어서 수고스럽게 너의 집까지 한시간 반을 왔다간 내 모습이 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닌가..
아니면 내가 지난 내 감정들을 더 미화해서 떠올리고 있는 건가..
정작 함께 있을 때에는 사실 나보다도 본인 스스로를 더 사랑하는 것 같아 늘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떨어져 있을수록 괴롭고 그리운 건 나라는 사실이 슬프다.
내가 너를 왜 사랑하는지를 고민해보자면, 다른 어쩔 도리가 없기에 사랑을 한다.
사랑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상처받을까 두려워도 그냥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다.
단 한번 니가 나에게 거짓말한 사실을 들킨 이후부터 나는 멀리 떨어져있는 네 모습을 상상하면 불안하다. 어쩌면 그래서 분리불안같은 게 생겼는지 모른다. 내 상상에는 한계가 없고, 나는 여전히 너를 온전히 믿을 수 없고... 믿을 수는 없는데 사랑한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힌다.
나는 내 가치관이 워낙 뚜렷해서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철저히 무시하며 살아왔는데, 이미 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예상치못한 모습을 보이니까 밖으로 밀어낼 수가 없다. 그리고 밀려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꽉 붙잡고 놓치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고, 그냥 마음 단단히 먹고 다시는 그런 행동 안 하겠다고 반성하고 돌아와주면 좋겠다. 거짓말하는 사람을 고쳐먹겠다는 내 마음이 잘못된 걸까? 분명 거짓말하는 사람이 나쁜 건데 왜 고통은 내가 받는 걸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말한 후 다시 만난지 한달밖에 되지 않았을 때 또 거짓말을 한 사람은 본인이 거짓말을 한다는 자각조차 없는 걸까?
지금껏 혼자서 잘만 살아왔는데, 2n년간 살아온 내 인생 속에 고작 3년 다녀간 네 시간이 내 시간에 억척스럽게 달라붙어서는, 떨어져 나갈 때에도 곱게 똑 떨어지지 못하고 끈덕진 자국만 잔뜩 남기고, 내 시간에 엉겨붙은 살갖까지 아프게 뜯어 가버린다. 니가 없는 내 옆자리는 아프다. 나는 어쩌면 고통을 즐기는 마조히스트인가? 왜 멀쩡한 관계를 최악의 모습까지 상상해서 미리 끊어내버리고는 혼자 괴로워하는지...
하지만 또 관계를 다시 억지로 이어붙여 보려고 해도 벌써 두번째라는 사실에, 이제는 네 쪽에서 나를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나는 미친 사람이라서 저 먼 미래에 니가 나를 배신하거나, 떠나갈까 두려워서 현재에도 아무것도 하지못한다. 사실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될 줄 알았으면 애초에 나는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볍게 시작한 탓에 너무 즐거웠고, 생각지도 못한 경험들을 많이 할 수 있었고, 삶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에 대해 배웠다. 그래서 헤어지게 된다고 하더래도 미운 것보다 좋은 것들이 떠오를 것 같다. 생각에 잠기다 보니 기억이 자꾸만 미화되어서 좋은 점들만 떠오른다. 차라리 단점들이나 좀 떠오르지.. 왜 이별하는 순간에는 지금까지 나를 괴롭혔던 상대의 단점들은 다 날아가버리고 행복했던 시절들만 기억에 콕 콕 박힐까.
싸웠던 게 없던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내가 못 보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걸... 내가 몰랐더라면... 중범죄는 아니지만 신뢰는 떨어졌고, 찝찝할 수밖에 없는 이 일을 내가 하필 왜 알아서.. 왜 하필 갈수록 좋아지기만 하던 때에...... 그냥 나만 몰랐으면 됐을 텐데.. 아 근데 이거 위험한 생각이다. 이래서 나중에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 상대가 바람피운 사실을 제3자가 알려주면 화를 내는거구나. '그냥 나만 몰랐으면 우리는 완벽했을 텐데. 행복했을 텐데' 하면서... 진짜 끼어들면 안된다는 이유를 왠지 깨달았다.
나도 만약에 이 상태에서 다시 어찌저찌 극적 화해를 해서 결혼까지 갔다가.. 나쁜 일이 터지면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될까? 그렇게 당했으면서 또 정신을 못 차리고 나만 몰랐으면.. 나만 희생했으면 나는 행복했을 텐데..라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