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랴...?

by 화이불류

어느새 '인생의 정오'를 훌쩍 넘어선 나이... 그래서 두렵다.
나이를 들어갈수록... 안다는 것의 피상성이 점점 선명한 경험의 세계로 다가와 두렵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결코 길지 않음이 여실해질 때마다 비가역적으로만 흐르는 시간의 매정함은 무력한 내 앞에 공포가 되어 다가온다.
종착지가 보이지 않는 표류는 나이 듦을 점점 절망으로 내몬다. 절망의 소용돌이에서 출구는 찾을 길이 없다. 하루 동안의 열심도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과제로서의 자기를 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대자적(對自的)으로 존재한다.
나는 나를 둘러싼 외부 세계에 대해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나에 대해서도 존재한다. 나는 나보다 앞서 존재하며 나를 바라본다. 과제로서의 '나'는 현실의 필연에 갇힌 '나'를 보며 고뇌하고 불안해한다.


과제로서의 '나'는 남겨진 자의 과제이면서 떠나갈 자들에겐 애달픔이다.
자식에 대한 염원을 짊어진 연로한 부모 앞에 남겨진 아들...
이를 바라보는 떠나갈 부모의 애달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랴...?"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운 이유는 그에겐 구원의 소망을 굳이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과제로서의 자기'에 이르기 위해 눈을 돌려 자기밖에 있는 '신'을 바라볼 이유가 없다. 이미 그에겐 더 이상 '과제로서의 자기'는 존재하지 않는 만큼 실존에 대한 고뇌가 없다. 그의 소유가 그를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타자로서의 신으로부터 스스로 고립되어 존재(실존에 대비되는)에 머문 즉자적(卽自的) 인간인 부자와 마찬가지로 숙명론자에게도 '과제로서의 자기'는 보이지 않는다. 소유가 부자를 삼킨 것처럼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의 필연이 그의 가능성을 덮어버렸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대로 그들은 호흡할 수가 없다.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의 필연에 속해있는 자기와 그 필연이 한정(限定)하는 가능성 안에서 되고자 하는 '과제로서의 자기'와의 종합인데 필연성이든 가능성이든 어느 한쪽의 자기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예배와 기도는 한낱 도덕적 고양이거나 종교적 감상의 고조일 뿐이다.


방탕한 세월을 살다 인생을 탕진한 삼손은 자신에게 운명 지어진 '과제로서의 자기'에 이를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잃고 말았다. 두 눈이 뽑히고 그의 영웅적 힘의 원천이었던 머리카락은 인정 없이 잘렸다. 그의 안에는 자신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그 어떤 조건도 보이지 않는다. 어떤 시도도 무용한 절망만이 그의 마지막 남은 실존을 채운다. 이 가혹한 종착지를 앞에 두고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제 그는 모든 기대와 희망이 사라진 이 필연의 현실에 갇힌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피상적 신앙의 대상이었던 신을 바라보아야 할 때다.

하지만 그에겐 그럴 자격조차 없다. 신에게서 자신의 구원을 얻는 대가로 지불해야 할 값이 그에겐 없다. 나실인의 조건이었던 고결함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두고 신과 거래할 수 없다. 그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기댈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자기 밖의 신이 아니라 오직 인간을 향한 신의 한없는 연민과 용서, 사랑이다.

그는 절망이 운명을 삼켜버린 마지막 순간에 오직 거기에 기대어 신에게 부르짖었고 자신의 구원을 이루었다.


세월은 삼손의 머리카락을 자른 삭도처럼 나의 기력을 앗아간다. 의지만으로는 헤어 나올 길 없는 이 암울한 필연의 굴레에 갇힌 나는 종착지에 이르기까지 구원을 볼 수 있을까?

무한한 인애(仁愛)의 그는 정말 육신으로 다가온 신인가?

그의 정체(正體)와 사랑이 요청하는 믿음은 과연 나의 실존적 구원을 이루기에 기댈 만 한가?


파스칼(Blaise Pascal)의 내기 논증이 떠오른다.

우리는 알 수 없더라도 결단하고 행동해야 할 때가 있다. 냉엄한 이성과 인식보다 의지와 실천이 앞서야 할 때다.

나의 이성은 그가 정말 성육신(成肉身)한 신인지 알지 못한다. 설령 어떤 이가 격렬한 체험을 통해 그의 신적 정체(神的 正體)를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누구에게나 해당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신적 정체에 관한 사실은 우리의 경험적 이성을 아득히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그의 신적 정체를 검증할 어떤 권위도 근거도 방도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는 오직 자신(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에 의거하여 실존적 도약을 할 것을 당부한다.


그는 나의 구원을 두고 그 어떤 거래조건도 요구하지 않는다. 오직 믿음 이외에는...

그것이 필연적 절망에 빠져 헤매는 나를 구제한다.

값없이 주어지는 천금 같은 은혜...

이 얼마나 경탄할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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