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주에 대한 짧은 생각

by 화이불류

얼마 전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음주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다. '절제'라고 할 만한 범주에서의 음주조차 허용될 수 없다는 절대금주의 단언이었다. 우리나라 기독교에서 오랫동안 불문율처럼 되어버린 준칙에 따라 나 또한 그것을 당연시했고, 기독교인의 음주여부는 신실한 신앙생활의 바로미터처럼 여겨왔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거기에 대한 나의 생각은 예전과 다르다. 여전히 나는 기본적으로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 건강상의 이유에서도 술은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편이 백번 천 번 유익하다. 술을 즐겨하지도 않거니와, 꿔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나는 술자리가 몹시 불편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술을 아예 입에도 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주 드물게 홀로 법주(法酒)를 1/4에서 1/3 홉정도 마시거나 친구와 식사 대접을 주고받으면서 반주로 한두 잔을 걸치기도 한다. 나는 그에 대해 결코 해서는 안될 금기를 범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 밖의 사람들은 예수는 포도주를 즐기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기독교인들은 음주에 대해 그토록 엄하기만 하냐며 묻고, 기독교인들은 예수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기후적 여건이나 지질학적 조건 때문에 음용에 적합한 물을 얻기가 용이하지 않아 그 대용(代用)으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었다고 금주의 정당성을 변론한다. 심지어 어떤 기독교인들은 금주를 더욱 옹호하기 위해 예수 당시의 포도주는 포도주가 아니라 포도즙이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당치 않은 소리다. 포도껍질 속의 효모가 당과 시간을 만났는데도 발효와 숙성을 하지 않고 여전히 포도즙의 상태로 있을 수 있다니...


공관 복음서(요한복음 2장)에는 예수가 처음으로 행한 이적(異跡)으로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마셨던 포도주는 음용수의 대용이었을까?

잔치의 흥이 무르익을 무렵 포도주가 동이 났다.

잔치를 준비하는 측에서는 넉넉하다고 여길 만큼의 포도주를 마련했을 것이다. 아니면 잔치 참여자 수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려나?

어쨌거나 이쯤 되면 아쉬움을 애써 억누르고서라도 진작에 그만 마셔야 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감히 술을 입에 대다니...)

하지만 예수는 잔치를 준비하는 하인들로 하여금 동이에 길어온 물을 가져오게 하여 아예 그 자리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한다. 그것도 한 술 더 떠 할인매장에서나 파는 싸구려 포도주가 아니라 최고급 포도주를 말이다.

만약 포도주가 물(飮用水)의 부득이한 대체제(代替財)였다면 물은 포도주보다 귀했을 것이다. 마시기에도 아까운 그 물은 음용 이외에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해 떠다 놓은 물은 아닐 것이다. 포도주가 물의 대용이었다면 그냥 그 (귀한) 물을 마시면 그만이었다.


금주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절대조건일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든 수긍하더라도 신앙의 신실성을 위해서는 필수적 절대조건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자칫 금주가 여하한의 허용도 용납하지 않는 이유불문의 칙이 되는 순간, 그것은 마치 신봉해야 할 우상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우상의 폐해는 단지 신앙의 대상에 대한 배신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상이 야기하는 보다 심각한 폐해는 그것이 우리의 인격성을 마비시킨다는 데에 있다. 우상은 인격성의 기능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기독교인에게 하나의 교조(敎條)처럼 되어버린 절대금주에 대해 (기독교인으로서의) 개인의 사유와 판단에 따라 그 타당성과 적실성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왜 부당하다고 간주되어야 하는가?


구약시대 법은 대체로 '... 하지 마라.'는 명령이 대부분이다. "탐내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등등. "남이 자기에게 제발 하지 말았으면 하는 행동을 너도 타인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구약시대 법의 특징이다.

이는 정의의 법이다. 인류가 고안한 거의 모든 법은 이 정의의 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신약시대 예수가 설파한 법의 특징은 '... 하라.'는 명령이 압도적인 전부를 차지한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 편도 돌려대며...",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내어주며...",

" 누가 네게 억지로 오리를 가자하거든 그와 함께 십리를 동행하며..."......

이는 정의의 법을 초월한다.

이는 바로 천국의 법령, 곧 사랑의 법이다.

느닷없이 술 얘기를 하다 말고 사랑의 법 운운이라니....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표징을 나타내는 태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불법을 행하지 않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 이것이 예수가 공생애 동안 보였던 제자도의 모범이다.

세상에서 기독교인과 기독교 밖의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종교활동 이외에 절대금주와 절대금연 말고는 무엇이 있는가?

정작 우리 기독교인들의 정체를 나타내는 표징이 되어야 할 세상을 향한 사랑과 배려의 태도는 절대금주와 절대금연에 묻힌 것은 아닌지...

기독교인으로서 음주여부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하나의 교조에 종속될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맥락을 염두에 두고 인격적으로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고린도전서 10 : 23)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로마서 14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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