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안, 고귀한 실존의 조건

by 화이불류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의 '팡세'에서 눈길을 끄는 곳은 누구나 그 출처를 알 만한 클레오파트라의 코 이야기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와 같은 저명한 문구가 나오는 대목이 아니라, 내기 논증에 나오는 대목이었다.

"무지 속에 있더라도 결정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은 올바른 방향을 알 수 없지만, 어떤 행동을 할지 정해야만 한다. 이것은 의지가 인식에 앞서야 하는 때이다. 이 경우, 선택의 자유는 이성보다는 의지에 존재한다."(팡세/IVP/김화영 옮김)


항상성(생명체가 생존에 있어서 최적의 조건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은 늘 우리에게 허술함이 없는 선명한 사실과 명료한 인식을 요구한다. 알려진 세계, 빈틈없이 인식된 세계는 결정된 세계이다. 항상성의 가장 큰 저해는 미지의 영역, 곧 불안 앞에 놓여 있을 때이다. 항상성은 미결정(未決定)의 세계를 견디지 못한다.


무속을 신봉하는 자와 다를 바 없이 기독교인들조차 미래의 자기 운명에 대한 구체적인 결정을 신에게 맡기려 한다. 불안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명을 마주할 엄청난 부담을 감당할 수 없는 나머지, 우리는 불안을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서의 자신의 결정을 타인에게 전가한다. 그러나 부버(Martin Buber)의 말대로 인간의 우선 요건인 자유의 구현은 운명을 마주할 결단을 할 때이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타인에게 묻는다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인식된 세계, 알려진 세계는 결정된 세계이다. 그 세계에서는 엄밀하고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택은 없다. 우리의 선택은 이해타산에 따른 계산적 반응의 위장일 뿐이다.

우리가 참으로 실존적 자기를 향유할 때에는 불안이라는 안개가 자욱한 미지의 세계를 통과할 때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로서의 자기를 발견하며, 자기를 알며 이해하게 된다.


결정된 세계에서 항상성에서의 안주(安住)가 불안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건저 낸 선택보다 값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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