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고맙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서는 꽤나 뿌듯한 얼굴을 하고 마음대로 맞은편 의자에 삐딱하게 앉는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한다.
[안 고마워? 그냥 둘 걸 그랬나? 맘에 드는 줄 알았으면 그냥 두는 건데 괜히 참견했나 보네. 너 표현 안 하는 버릇 여태 못 고쳤냐. 생각만 하지 말고 말을 하라니까? 모른다고 그러니까... ]
[반말하지 말랬지. 누나라고 해.]
[아 뭐야 어색하게. 어떻게 너한테 누나라고 하냐.]
그 순간, 정작 이 녀석 입에서 누나라는 소리가 나오면 서운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놀랍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하다.
[외국에서 살더니 취향이 글로벌해졌어~ 그래서 그동안 외국 남자들은 좀 만나봤고?]
[...]
[뭐야 진짜야? 야~우리 순둥이 많이 달라졌네 진짜 누나라고 해야겠어~]
[하지 마]
[아 뭘 하지 마~그래서 안 들어오고 사는 거고만. 누구야? 영국인? 이야~역시 사람은 외국물을 먹어야 해~]
[하지 말라고.]
네가 뭘 안다고. 이 자식 특유의 '내가 다 알지'식의 말투가 나오자 슬금슬금 화가 나기 시작한다. 강산도 변할 만큼 시간도 흘렀고, 나이 앞자리도 바뀌었는데 이자식의 이 성격은 왜 바뀌질 않은거지. 도대체 그 동안 뭘하고 살았길래 이 오만하고 재수없는 태도는 수그러진 것이 아니라 더 업그레이드된 느낌이 들까.
[콜록콜록]
[으이구~그래 내가 너 그렇게 입고 밖에서 맥주 마신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 마시고 싶으면 방에서 마시고 자든지 하지 누굴 꼬실라고 이 밤에 여기까지 나와서 분위기를 잡냐. 하긴 뭐 그렇게 걸려드는 것들이 있으니까. 이제보니 노린거였구만. 여우 다 됐어~]
[신경 꺼.]
[들어가서 빨리 잠이나 자라. 잘 마시지도 못 하는 거 가지고 폼 잡다가 감기 걸렸다고 골골대며 다니지 말고.]
ㅡ움찔ㅡ
순간 무심코 머리 위로 다가오는 녀석의 손이 닿기도 전에 움츠러들고 말았다. 뭔가 진 기분이다. 기분이 나빴다.
[간다. 내일 늦잠 자지 말고 일찍 나와라.]
싱글거리면서 방으로 돌아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새삼스럽고 낯선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처음 보는 것만 같은 그런.
[...죄송합니다...]
[아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요? 손님이 가이드를 깨우러 가야 하는게 말이 돼? 내가 지금 유럽 여행만 몇 번짼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는 처음이야 진짜]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에요? 지금 가이드 아가씨 때문에 오전 일정이 다 어그러졌잖아요! 바티칸은 새벽부터 가서 줄 서야 한다는데 이게 뭐에요 진짜. 어떻게 책임질거야.]
[정말 죄송합니다...저희 사전예약되어 있는 표라 들어가시는데 지장은 없을거에요...]
[에이~ 이모~ 아직 8시도 안 됐다~ 대신 내가 다 깨워드렸잖아요~ 우리 이모 화내니까 무습네~ 안 이쁘다 이모는 웃는게 이쁜데. 즐겁자고 여행온 건데 화내지 마요~ 주름 잡힌다~~여 이탈리아 커피 유명하다는데 모닝커피하러 가면 좋겠구만~ 그건 가이드 누나가 쏘고! 안 그래요 이모?]
변죽도 좋지. 누가 보면 정말 이모인줄 알거다. 사실은 고작 일주일 남짓 같이 다닌 그저 같은 패키지 여행객일 뿐인데. 하긴 처음 가는 식당에서도 수십번 왔던 단골 손님마냥 이모이모 부르며 친한 척을 해서 '언제 여기 왔었어?'하고 속삭이듯이 물어보곤 했었지.
[내가 진짜 아가씨가 우리 딸 같아서 참는거야. 앞으로는 이러지 마요. 젊은 사람이 그렇게 정신이 없어서 어떻게 해.]
[감사합니다~ 저도 사모님이 엄마 같이 잘 해주셔서 긴장이 풀렸었나봐요~ 지금부터는 정신 바짝 차려서 더 즐겁게 여행하실 수 있게 열심히 할게요~이따 로마에서 제일 맛있는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도 한 잔씩 돌리구요!]
아침부터 일진이 좋지가 않다. 간신히 견습 졸업하고 처음으로 정식 가이드로 처음 진행한 행사, 그것도 첫 일정부터 지각이라니. 이런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알람을 5분 단위로 한 시간 전부터 맞춰놨는데 첫 번째 알람을 껐던 기억 외에는 들은 기억 조차 없다.
[쯧쯧... 니가 이런 시간에 어떻게 일어나나 했다. 내가 늦잠자지 말라고했는데 참 말 안 들어. 잠 많은 건 여전하네. 진짜 넌 왜 이렇게 바뀐게 없냐.]
[상관하지 마.]
[나 아니었으면 너 여태 자고 있었을걸? 고맙다고 해도 모자랄 판에 성질은...]
이게 다 어제 잠을 설친 탓이다. 어제 저녁 테라스에서 이 녀석이 방으로 돌아가고 얼마 안 있어서 방으로 돌아갔을 땐 늦은 시간은 아니었는데 침대에 누워서 한참을 잠들지 못했다. 그게 꼭 이 녀석 탓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녀석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 잠을 잘 수 없었으니 원망하는 마음이 불쑥 불쑥 고개를 들고 만다.
[자 이쪽으로 모이실게요~!]
무시해야지. 지금 이녀석과 감정소비를 할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니까. 보수의 반도 못 받고 견습이라는 이름으로 3개월을 주말도 없이 패키지여행을 따라다니며 쪽잠을 자고 이제서야 계약직이지만 가이드라고 명함도 팠고, 무엇보다 비자가 끝나기 전에 정직원이 되어야 비자 연장을 할 수 있다. 워킹홀리데이비자가 6개월도 안 남은 지금 다른 곳에서 일을 구하거나 결혼을 할 수 있는 외국인이나 영주권자를 만나게 될 행운 따위는 백마탄 왕자님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것 만큼이나 현실성이 떨어지는 일이지.
[자~ 여기가 로마 3대 카페 중 하나인 '타짜도르'랍니다. 로마에 오셨으니까 로마식으로 오전에는 잠을 깨워주는 에스프레소 한 잔 씩 드셔야겠죠? 오전에 제가 큰 실수를 했으니까 제가 한 잔씩 사드릴게요~]
[가이드아가씨 나는 에스프레소 이런 거 안 마시는데 거 한국 커피 같은 건 안 파나? 종지만한 거 그거 쓰기만 하고 별로일 것 같은데...]
[아이고 아버님~ 한국 믹스 커피 이따 숙소 가서 제가 하나 드릴게요~ 근데 지금은 속는 셈치고 딱 한 잔만 드셔보세요~ 이탈리아사람들은요 아침에는 진한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한 스푼 듬뿍 넣어서 한 입에 털어넣는답니다. 오후에는 카푸치노를 마시구요. 저도 원래 에스프레소같은 거 못 마셨는데 여기 와서 먹기 시작했어요. 한국 가면 이건 못 드신다니까요~]
아침에 지각을 한 사과의 의미로 내가 산다고는 했지만 사실 손님들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본래의 일정과 경비에 있었던 것이라 실제로는 내가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럼 뭐 어때 여행 초반의 어색함을 깨는데는 이만한 너스레도 필요한 법이라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제법 잔뼈 굵은 가이드가 된 것 같다.
[와 이거 진짜 맛있네~이기 뭐라꼬?]
[에스프레소에요.]
[아 근데 좀 크면 좋겠다. 이기 뭐 소주 먹는 것도 아니고. 리필 안 되나 리필.]
[아따 이 양반아. 여 그런 게 어딧노? 식당에서 물도 돈 주고 사묵어야 한다는데.]
아저씨들의 어깨 너머로 문득 그 녀석이 보인다. 손에 든 하얀 에스프레소 잔이 유독 작다. 아니, 손이 큰 거던가. 수시로 뻗어 내 머리 위에 얹어두고 손가락끝으로 피아노치듯 간질이길 좋아했던 손. 길지 않은 손톱과 굵은 마디 그리고 툭툭 두 갈래 굵은 핏줄이 손등을 따라 손목으로 그리고 팔뚝을 따라 쭉 뻗...
아 젠장...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한쪽에만 보조개가 있어 유독 한쪽 입꼬리가 더 올라간 것처럼 보이는 특유의 웃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니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지하고 말하는 것만 같아 부끄러움보다 울컥 화가 난다. 니가 알긴 뭘 알아 나에 대해서 아는게 뭐가 있어.
[가이드 아가씨 우리 점심은 뭐 먹나? 뭐 찌개나 이런 거 먹음 좋겠는데. 아침에 빵 이런 거 먹었더니 먹은 거 같지가 않네. 한국 사람은 역시 밥을 먹어야지.]
어제 저녁 로마에 도착하긴 했지만 런던 파리를 거쳐 마지막 여행지가 로마인지라 벌써 한국을 떠난 지 일주일, 빵에 질릴만도 하다. 한국에 있을 땐 매일같이 피자파스타를 먹어도 질리지 않았던 나 역시 2년 가까이 외국에 살면서 내가 하루 한 끼는 그게 누룽지라고 해도 한국 음식을 꼭 먹어줘야 하는 토종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자자 그럼 제가~ 로마에서 제~일 맛있는 한식당으로 모실게요~ 마음껏 드세요~]
[와 이거 명이아니가? 여도 이런게 있네. 김치찌개는 마 니보다 훨 낫다]
[뭐가 훨 낫노. 이기 다 조미료 넣어서 그런기다. 내도 조미료 팍팍 넣어가 끓이면 똑같다. 뭐 알지도 몬하면서 뭐라카노!]
엄마 아빠 나이뻘인 아줌마 아저씨들이 한국에선 매일같이 먹었을 반찬을 두고 아이들이 새로운 장난감을 볼 때처럼 신기해하는 모습을 보면 귀엽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똑같이 반복되었을 반찬 투정까지 지구 반대편 비행기로 12시간 거리의 이곳까지 그대로 들고 온 그들의 일상을 보면 부모님 생각이 나기도 하고. 그러고보면 저런 대화 언젠가 한 번 저 녀석이랑도 한 적이 있었지.
저 녀석 생일에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끓였던 소고기 미역국이 인터넷 레시피에서 본 그대로 했는데도 좀처럼 맛이 나지 않아서 울상을 지었더니 서랍에서 소고기맛 조미료를 꺼내 조금만 넣으라고 했던 너와, 조미료를 넣으면 그건 요리가 아니라고 했던 나. 결국 어떻게 했더라. 조미료를 넣었던가 안 넣었던가. 처음 끓이는 거라 미역 양을 조절 못 해서 무섭게 불어나는 바람에 결국 들통에 옮겨 가득 끓여둔 미역국을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일주일 내내 매 끼니마다 먹으면서도 태어나서 먹어본 중 제일 맛있었다고 먹을 때마다 꼬박꼬박 전화해줬었는데. 마지막 쯤엔 상했을까봐 먹지 말라고 했더니 점점 깊은 맛이 나는게 사골국물 같다며 웃었었지. 그게 조미료 덕이었을까, 아니면 맛과는 무관하게 맛있다고 먹어준 거였을까. 저 녀석은 기억이나 할까. 무심코 그 녀석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릇을 들어 바닥까지 닥닥 긁어 먹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기억이 날 리가 없겠지. 그런 사소한 일 따위. 몇 년이나 지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