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책이 Nov 25. 2024

<나를 위한 돌봄>너한테 미안하지 않아. 나에게 미안해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DAY12, 1인칭 마음챙김 #하나도 안 미안해 

나도 모르게 자주 쓰는 말 중에 "죄송해요", "미안해요"가 있다.

습관처럼 사과를 하는 내 자신이 너무 싫어 의식적으로 연습도 많이 했다.

절. 대. 먼. 저. 사과하지 않겠다 하는 다짐도 했었고

잘못한 게 없는데 사과를 하면 무조건 지는 거라 생각했다.


대학시절, 어떤 어른은 내게 말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 교통사고가 나도 먼저 죄송해요..라고 하면 다 끝난 거야. 네가 다 100% 책임질 수 있는 거라고. 그니까 함부로 사과하지 마!"


나는 그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안 그래도 사람들이 나를 얕잡아 보는데 강하게 나갈 수 없으면

말이라도 조심해야겠다고 우격다짐했다.


근데 사회로 나아보니... 어라?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모두가 서로 먼저 사과를 하지 않으려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니

무의미한 에너지 싸움이 너무 많았다.


얼마 전의 일이다.

나를 죽도록 괴롭히고, 퇴사를 고려하게 하고, 이직을 결심하게 하고

남초사회구나- 얼씨구 하며 폭력적인 조직문화를 만든 나이 많은 대장이

복도에서 지나가는 나를 굳이 불러 말을 시켰다.


본론은 인사 제대로 하라는 거였다.

자신이 저지른 일은 그냥 지나가는 에피소드일 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위인이라는 건 알았지만 

역시 꼰대이자 개저씨였다. 


그것도 과거와 똑같이 사람 없는 곳에서  마주쳤을 때 불러 세우는 일이, 그 모양새가 정말 

작년처럼 비겁하고 졸렬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과거에도 지금도 진짜 잘못한 게 100% 아니, 1000% 없는데 "저기, 죄송한데요"라는 말을 하고 말았다.


입을 꿰매고 싶었고

소주 1L를 들이부어 그 말들을 다 소독시켜 없애버리고 싶었다.


난 떳떳했지만 쭈뼛하며 '죄송한데요'를 쓰고 만 것이다.

나에겐 도파민이 아니라 쫄보 유전자에게 있는 쫄파민만 있나 보다.


몇날며칠을 앓았다. 겸손도 죄악이라며 스스로를 미워했다.

그러다 얼마 전 나의 상담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그 사람한테 미안한 게 아니에요. 원래 00 씨는 사람을 만나면, 동료를 만나면, 선배를 만나면 인사를 하는 게 당연하다는 명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명제를 지킬 수 없는 스스로에게 미안했던 거예요.

상대에게 굴복한 것도 아니고 진짜 죄송했던 것도 아니죠.


그만큼 상처받았고, 아직도 아프고, 고통스러우니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 그 명제를 지킬 수 없었던 거죠. 

그러니까 나의 명제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 것뿐이에요.


마음에 봄비가 내렸다. 


내가 내뱉은 그 졸렬한 '죄송한데요'라는 말 때문에

맑은 날 지렁이처럼 쪼그라들었었는데..


아니었다. 내가 쪼그라들 이유가 없었다.


난 이제 알았다.

나의 명제, 나의 가치에게 사과를 해야 할 만큼 

상대는 정말 옹졸하고 무식한 쓰레기였던 거다. 


너한테 하나도 안 미안하다.

나는 내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에게 미안해. 내 명제에게 미안해.



 

 

작가의 이전글 #엄마13 취향에도 계급이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