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아이를 보았다

by 봄날의 북극

여자아이를 본다.

3월의 햇살이 흐릿한 것인지 뿌연 미세먼지 때문인 것인지 모를 불투명한 빛이 아이의 머리 위에 떨어진다.

초등학교 비탈길.

오전 수업이 끝나버린 시간.

3학년 정도로 보이는 어리 소녀는 혼자다.


건널목 신호등 앞에 신호등을 관리해 주는 콘솔 박스를 만지작 거린다.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아이는 금세 흥미를 잃었다는 듯 돌아서 걷는다.

말총머리를 한 아이의 머리카락이 오른쪽 왼쪽으로 경쾌하게 흔들린다.

머리카락의 경쾌한 리듬과는 상관없이 아이의 표정은 무표정하고 어쩐지 슬퍼 보인다.

슬픔이 느껴지는 것은 3월의 햇살이 불투명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가 정말 슬펐는지 어떠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이는 신호등이 점멸하는 횡단보도를 건넌다.

나와 조금 더 멀어진 아이를 본다.

아이는 학교 담벼락에 쌓아 올린 블록 사이에 틈을 잡더니 성큼 기어오른다.

'저런~ '나도 모르게 걱정의 탄식이 흘렀지만 아이는 두어 걸음만 기어오를 뿐 툭 길에 내려선다.

등에 매달린 가방이 충격에 출렁 거린다.

말총머리가 촐랑촐랑 거리는 리듬과 함께 아이는 가볍게 타닥타닥 총총걸음을 걷는다.

그럼에도 아이의 뒷모습은 슬퍼 보인다.


마침 또래의 한 무리 아이들이 건너편 비탈에서 내려온다.

재잘거리는 아이들. 각자 손에 간식거리를 들고 조그만 입들이 바삐 소란하다.


건너편 아이는 총총걸음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어간다.

혼자인 아이가 슬퍼 보였던 것인가 생각해 본다.

꼭 그렇지 만은 않을 텐데.

저 비탈이 끝나는 지점에 만나기로 한 친구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이의 총총걸음도 촐싹거리는 작고 귀여운 말총 머리카락도 아이에게서 슬픔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불투명한 3월의 뿌연 햇살이 눈 부시다.

아이는 조금씩 나에게서 멀어진다.

비탈이 끝나간다.

비탈이 끝나는 지점에서 아이는 오른쪽으로 난 길을 꺾어 사라지고 있다.

아이의 슬픔이 나의 착각이었기를.


그럼에도 아이의 촐랑거리는 말총 머리카락이 한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콘솔 박스를 마지작 거리다 나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설 때의 찰나에 보았던 아이의 눈이 슬픔의 원이 이 아니었을까를 나는 그날 저녁에서야 깨닫는다.


울지 않았지만 아이의 눈은 텅 빈 동굴 같았었다.

그가 흥미롭게 바라본 것은 콘솔 박스도 담벼락의 블록도 아니었음을 알 것 같다.

건너편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도 그 아이에게는 슬픔의 원인 이 아니었음을 알 것 만 같다.

아이가 비탈길을 올라가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간 후 그 끝에서 누군가를 만나지 못했을 것임을 나는 슬퍼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텅 빈 동굴 같았던 아이의 눈동자 속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던 걸까. 그날 밤, 무채색의 시선이 나의 밤까지 따라왔다.

이름 모를 아이의 눈동자에 더 이상 차가운 바람이 머물지 않기를 바라며, 공감할 수 없었던 나의 부족을 용서하기를 바라며 밤이 길어지지 않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