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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북극 Sep 03. 2024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김윤석은 낮은 목소리 톤으로 무겁고 진중하게 읆조리다.

나는 피식 웃으며 '났겠지' 라고 말한다.

아무도 없는 숲이건 울창한 숲속에 사람많은 곳이 든

나무가 쓰러졌다.

설령 쓰러지는 바닥에 쿠션 좋은 흡음제가 깔려 있다 하더라도

휘청 거리며 바닥으로 쓰러지게 되면 '쿵'이든 '콩'이든 소리가 났겠지.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아저씨.'

왜인지 살짝 짜증이 난 목소리로 나는 혼잣말을 한다.

김윤석의 낮은 베이스 톤 대신 

나는 매마른 톤으로 듣지 못 할 사람인데도 , 아니 티비인데도 그 앞에서 왜 그러고 있는 걸까 갸웃 하면서도 그 대사가 나올때 마다  그러고 있다.


나무가 쓰러진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서 소리라는 것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소리라는 것은 인식론적인 문제이다.

사물이나 현상이 존재 하려면 그것을 인지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는가?

아님 그 자체로 하나의 현상이 완결되는 것인가.

소리를 듣는 주체로서의 나는 '쿵' 하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인지한다.

인지 하는 과정은 현상으로서 존재하는 그 사실이 뇌에 전달되고 뇌는 그 현상을 분석하여 인간의 언어 체계 안에서 '쿵' 이라는 소리로 정의를 내린다.


그것은 인간인 나에게서 전달되어 해석된 현상이다.

소리라는 현상이 관찰자의 존재에 의해서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졌을 때 아무도 듣지 못한 '쿵' 소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나무는 쿵 소리를 내지 않았다고도 말 할 수 있을까?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과 비슷한 문제이다.

고양이는 살아 있는 것과 동시에 죽어있는 상태.

나무는 쓰러졌지만 쿵 소리가 난 것과 동시에

아무 소리도 없는 무음.

아니 어쩌면 쓰러져 있는 것과 동시에

쓰러지지 않은 상태라고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우리의 인식체계는 무척 주관적이다.

우리는 감각 기관을 통해 외부 정보를 받아 들이고 이를 뇌에서 해석하여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각 개인의 경험 배경 감정 등이 개입되어 같은 사건이나 사물을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한다.


객관적인 세상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색깔, 듣는 소리, 느끼는 촉감 등은 모두 뇌가 해석한 결과물입니다. 

이러한 해석 없이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이는 "나무가 쓰러질 때 소리가 났을까?"라는 질문처럼, 관찰이 없으면 그 현상이 실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우리의 인식 체계는 엄청난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감각 기관의 한계로 인해 일부 정보만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한 뇌가 특정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함으로써 왜곡된 인식을 가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착시 현상이나 환청처럼 실제와 다르게 인식하는 경우가 이를 보여준다.


결국, 우리의 인식 체계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을 구성하고 해석하는 필터 역할을 한다. 이 필터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다. 이 과정은 인간이 실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조지버클리는 "존재한다는 것은 인식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아무도 없는 숲속이라는 전제로 인해서 나무가 쓰러지는 현상의 존재는 인식되지 않는다.

인식되지 않은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될 수 도 있다.

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인식론 안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인식되지 않는 다고 해서 현상이 없다거나 존재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조지버클리는 "존재한다는 것은 인식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인식 주체가 없다면 그 대상은 존재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양자 역학 관점에서도 관찰 즉 인식의 행위가 상태를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인식되지 않는 상태는 잠재적인 여러 상태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뿐 하나의 확정된 상태로 존재 하지 않는 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우리의 인식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 중 일부를 포착 할 뿐 모든것을 포착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보지 못한 뒤편의 물체나 듣지 못한 다른 방에서의 소리는 여전히 거기에 존재하고 실재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즉 인식되지 않는 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톤의 목소리 윤계상 배우의 나레이션이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김윤석 배우의 톤과는 다르고 매마른 내 목소리와 다른 떨림을 가지 윤계상의 나레이션은

'쿵' 소리가 나고 나무가 쓰러지는 그 숲속 어딘가를 알고 있는 것만 같다.


나무가 쓰러진다.

나무의 쓰러짐은 끝인 것과 동시에 시작이다.

나무의 마지막 숨결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 될 것이다. 

아무도 없는 그 숲속에서 소리가 났을지 안 났을지 모를 그 속에서

뿌리째 쓰러진 나무는 자신의 마지막 숨결을 뱉어내고 새로운 싹을 틔울 것이다.

그 끝없는 순환의 일부로서 나무는 쓰러지고 새로운 생명은 잉태 될 것이다.

숲은 다시 조용해지고 그 자리에는 '쿵'소리의 유무와 상관없이 자리잡은 침묵으로 숲은 거기 존재한다.

처음부터 아무일 없었던 것 처럼.

무심히 바람이 부는 아무도 없는 숲속은 하나의 현상으로서 거기 존재한다.

나의 인식과도 상관없이 존재로의 숲은 거기에 나는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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