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의 끝을 찾아서

취경전

by 구일권

너 3살 때 일인데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며 어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그날은 아버지가 휴가를 얻어 전방에서 부산에 도착하는 날이라 어머니는 나를 안고 꽃집에 들러 꽃 한다 발을 들고 작은 이모와 부산역전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그때였다고 한다. 추운 겨울날 인지 더블 롱코트를 입은 키 큰 외국인이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웃으면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잠시 후 칙칙하는 힘찬 소리와 함께 시커먼 기관차가 강렬하게 김을 내뿜으며 플랫폼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 기억은 거기까지 인데 같은 시기 커다란 별이 그려진 캐러멜을 들고 아버지 지프차 뒤에 앉아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던 그 기억은 대전 유성온천에 갈 때라고 했다. 혹시 꿈속의 기억은 아니었나 싶었는데 모두 사실이라니 나도 놀라웠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나의 손주들도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게 될 텐데 아이들이 태어난 후 할아버지와 만나본 날이 전부 한 달도 안 되니 기억될 일들이 별로 없을 것 같아 아쉬울 뿐이다. 어릴 때 이불에 오줌 쌌다고 할머니가 이웃집에 키 씌워 소금 얻으러 보냈는데 뭔지도 모르고 좋다고 갔다가 싸리빗자루로 혼나고 돌아와 할머니에게 심술부리던 일들은 지금도 할머니와의 애틋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30~40년 전부터 섭섭했던 기억만 지금까지 꼭 안고 간직한 마누라의 그 기억 어떻게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는데 수시로 툭툭 튀어나오는 그 기억에 난 그만 질려 버렸다. 몇 년 전 기억이나 자기에게 불리한 기억은 못하는 건지 안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다른 사람들도 이런 지 궁금하다. 어제 TV에서 건축학 개론 이란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보면서 첫사랑의 기억이 새록새록 다시 솟아났는데 나의 첫사랑은 누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성년이 된 후부터라도 어떤 기준으로 정할지 헷갈리는 게 사실이라 세월이 지나면서 다시 시작한 사랑이 첫사랑이었다고 결론 내리고 말았다. LA 겨울날 이른 새벽 집 앞 멕시칸 식당의 불이 켜질 때쯤 담요를 뒤집어쓰고 베란다에 앉아 커피 한잔에 담배연기를 내뿜던 나는 오슬오슬 살갗을 스치는 추위를 즐기고 있었는데 하는 이런 소소한 기억들이 남아 있음에 허무해지려는 나의 머릿속을 채워주고 있다. 살면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빌면서 또한 나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겐 내가 편안했던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고 그리고 손주들과의 많은 시간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본다.故人이 된 최인호가 쓴 노랫말을 뒤적이며 모처럼 듣는 송창식의 "밤 눈 그의 노래 속에서 차분한 하루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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