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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권 Apr 13. 2022

기억나지 않는 여행

여행하면서 나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거나 의미 없이 시간만 보냈던 곳은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희미한 기억 속에 사라져 가는 느낌이다. 워킹홀리데이로 우리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곳 중 하나이며 11만 명 넘는 한인교포들이 거주하는 호주, 그곳 시드니 체스우드란 곳에 사는 동생집에서 한 달 가까히 지낸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곳에서 보낸 지난 일들 중 기억에 남는 일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관광객들이 다니는 여러 곳을 안 가본 것도 아닌데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다. 갔을 때가 한국은 여름이라 그 반대편인 시드니는 겨울 이어서 좀 쌀쌀한 날씨였는데 아침이면 집 앞 나무 위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구관조 같이 생긴 새들은 히치콕의 새들을 연상케 하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그리고 가끔은 전철을 타고 오페라 하우스 근처에 내려 그 주변을 산책하기도 했는데 쌀쌀한 날씨에 달링하버 선착장 앞에서 벌거벗은 채 악기를 연주하는 호주 원주민 에보리진의 모습은 호주에 대한 나의 느낌을 오래 끌고 갔다. 동생이 사는 체스우드란 동네는 맛집이나 볼거리가 많은 곳인데도 나에게는 선뜻 다가오지 않는 그런 동네였다.  즐거운 기억 이라고는 동생 내외와  좋아하는 와인을 거의 매일 저녁 마시며 때로는 하버브리지 근처에 있는 수산시장에 아침 일찍 가서 내가 좋아하는 오징어나 굴, 생선 등을 사다 놓고 오늘 저녁은 어떤 와인을 만나게 될까 하고 기대하는 그 시간이 마냥  즐거웠다. 동생은 내게 호주로 이민 올 생각은 없냐고 묻는 말에 나는 아니라고 바로 대답했다. 깨끗한 공기와 좋은 주변 환경 그리고 푸른 바다 등 살기는 최상의 나라라는 생각은 분명하지만 그곳에서는 자기 집이 아닌 경우 월세도 아닌 매주 집세를 내야 한다는 말에 정나미가 딱 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그곳에서 파는 소고기가 우리나라보다는 가격이 쌀 거라는 내 생각은 빗나갔고 다른 물가도 높은 편이었다. 그리고 타일이나 배관공 등 시설 설치나 수리를 하는 블루칼라들이 소득 1순위 직업에 들어간다는 그곳에서 돈을 벌 수 있는 대책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이민에 대한 꿈을 꾸기도 싫었다. 내 눈에 보이는 그곳의 팍팍한 생활들 때문인지 한 달이 지루하다고 생각하며 지냈던 시드니에서 나는 와인만 마시다 돌아왔고 그 후로는 호주에 대해 별 관심도 가지지 않게 되었다. 카톡으로 소식 전하는 동생이 이민 간지는 수십 년이 됐지만 그런 곳에서 잘살고 있는 걸 보면 용하고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간 세월도 많이 흘렀고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감퇴된 이유도 있겠지만 잠시 들린 곳이라 해도 어느 정도는 기억에 남아있어야 할 텐데 대만 국립 박물관의 옥으로 만든 배추에 붙은 메뚜기나 하이델베르크 학생들 술집 그리고 런던의 촛불 들고 지하로 내려가는 감옥 같은 술집 등 그런 조각난 기억 외에 그런 곳에 대한 다른 기억들은 전혀 없으니 내 인생의 스토리 일부가 사라진 느낌만 든다. 어린시절에 그렇게 그리던 로렐라이 언덕에서 라인강을 바라보았던 기억은 나는데 그곳에 무엇때문에  어떻게 가게되었는지는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아있기에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남은 기억들을 글로 남기고 싶어 시작했던 건데 뒤죽박죽 어떻게 돼가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저 기도하는 심정으로 웃음거리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콜로라도 덴버 상공이나 베트남 상공에서 날벼락 혹은 난기류에 말려 비행기가 요동 치던 그런 강렬한 기억들은 평생 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을 것 같고 파리 홍등가 뒷골목에서'안네의 일기 '영화의 주인공을 닮은 여자가 나를 불러 세우던 그런 기억은 지금 까지 남아있는데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들은 시시하고 피곤했었나 보다.오래전 벌레 꼬이는걸 막아준다기에 병에 넣어둔 유칼립투스 도 말라 그향도 사라지려는데 덩달아 지워질것같은 나의 흔적들을 뒤돌아보다 황량한 들판에서 비를 맞으며 서있는 버펄로의 지친 모습같은 나를 발견하고 지난 기억의 끝자락에 서서 깊은 성찰의  눈을 뜨고  면벽참선(面壁參禪)이라도 해야 할지 생각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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