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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권 Jun 19. 2023

술들이 점점 줄고 있다

고래가 사는 세상

오래전부터 해외에 나갈 때마다 한두 병씩 사다 놓은 양주들이 한때는 꽤 많았는데 가끔 한두 잔씩 마시다 보니  이제는 먹기가 아까워 남겨둔 25년 이상의 스카치위스키나 코냑등만이 진열장 속에 숨죽이고 앉아있다. 내가 저들을 사다 모셔놓은지 30년도 더 된 것들이 대부분이니 이 친구들도 나와 함께 늙어가고 있는 중이다. 오랜만에 진열장 속에 먼지를 닦아 낼 겸 술병들을 꺼내는데 어! 술들이 줄어있다. 아무도 건드린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황당한 생각에 알만한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건 당연한 거고 병 속의 술은 점점 더 줄어갈 거란 얘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엔 술병 속에는 위스키의 향과 흔적만이 남게 될 거란 생각을 하니 뭔가 허망한 인생사 같아 억울하고 아쉬운 마음부터 스쳐 지나갔고  어차피 그렇게 사라질 운명이라면 미리 다 마셔 버릴까 하는 성급한 마음부터  앞섰다. 특히 골프에 연관된 술병들을 바라볼 때마다 꿈꾸는 건 스코틀랜드 세인트 앤드류(St.Andrew) 골프장 올드 코스의 억센 풀과 모래언덕으로 황량한 벌판 그린옆  캠핑 의자에 기대어 바다 위로 내려앉은 석양을 벗 삼아 위스키 한모금 입에 담고 눈을 감는 것이었다. 이 친구들 때문에 이들의 고향인 스코틀랜드 위스키 성지를 돌아보려는 계획이 나의 버킷리스트 속에도 들어있었는데 그만 접을까 하는 생각 앞에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참 오랜 친구들이었기에 생각이 많아진다. 잠시 와인 때문에 외도를 한 적은 있지만 결국술은 스카치위스키가 최고라는 결론을 내린 게 얼마 전이기에 이들에 대한 애착과 아쉬움은 더해가고 있다. 지난 이야기지만 아들이 홍콩으로 이사할 때 놓고 간 와인 냉장고가 집에 자리 잡은 지 10여 년이 넘었는데 처음에는 냉장고에 와인을 가득 채워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었고 또 그 안에 가득 찬 와인들을 볼 때마다 금고 속의 골드바를 보는 느낌으로 마음이 뿌듯했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이젠 그 짓도 시들해지고 가끔 몇 병씩 사봐야 마시기 바쁘니 냉장고는 늘 텅 비어 있고 그 속에는 잡동사니들로 채워져 있다. 그렇게 와인과도 소원한 관계로 돌아 선 뒤 결국 아무 말 없이 기다리던 스카치위스키와 옛날의 애틋했던 시절로 되돌아 가려한다. 사케나 그 밖의 술들과의 만남도 가벼운 경험이었을 뿐 그렇게 깊은 사이로까지는 발전하질 못했기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이유를 굳이 댄다면 구관이 명관이라는 표현이 적당 한듯하다. 그러나 인생의  희로애락을 늘 함께 했던 조강지처(糟糠之妻)인 소주의 공을 잊을 수는 없으며 평생을 나와 함께하는 마누라나 다름없기에 지금도 늘 내 곁에 머믈고 있다. 세월이 가면서 술병의 술도 줄어들듯이 나의 주량(酒量)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언젠가 백골( 白骨)이 진토(塵土) 되더라도 내가 마신 술의 흔적은 남아 있을까 하는 법의학적 의문도 있지만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겨울에 먹는 화이트 와인과 석화 그조합이 최고라는건 알고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글에 언급된 생굴과 싱글 몰트도 찰떡궁합이라니 그 맛에 대한 궁금증이 솟아오른다. 또한 어떤 술이던 그 술이 빚어지는 고향에서 마셔야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다는 말과 좋은 술은 여행을 하지 않는다는 그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고 나니 노란 라벨에 그려진 커티삭 범선을 타고 위스키 로드를 항해하는 상상을 하며  멍 때리고 싶은 어느날 오랜 친구들중 하나였던 글렌피디히(Glenfiddich) 한 모금을 삼키며 그 맑은 영혼의 맛과 향을 느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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