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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권 Sep 03. 2024

로또 한 장 쥐고 돌로미티 가는   꿈을 연다.

고래가 사는 세상

휴대폰에서 야~ 하는 통화음 소리가 들렸다. 마누라에게서 걸려온 전화다. 갑자기 신경이 곤두 스며 왜? 그랬더니 올 때 메밀면 좀 사 와요 콩국물넣어 먹게. 하여간  마누라는 내가 친구들 만나러 나오면 꼭 이런 전화를 한다. 아니 친구들 만나는데 그걸 들고 어딜  돌아다니란 말이야 하고 퉁명스럽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마음 한 구석 나중에 듣게 될 훈계와 같은 잔소리가 두려워 결국 친구들 만나기 전에 일찌감치 순 메밀면을 사러 남대문 시장을 들린 후 약속 장소로 향했다. 까만 비닐봉지를 쳐다보던 친구가 그거 뭔데 들고 다니냐는  물음에 어! 마누라가 메밀면 좀사 오라고 해서라고 했더니 동병상련의 처지라 그런지 더 이상 묻지 않는 걸 보면 넘들도 마누라에게 추위 타는 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서태후 같은 마누라의 혹정 때문인지 얼굴에 점점 늘어나는 검버섯이 신경 쓰여 며칠 전 기미크림을 몰래 바르다가 걸려 경고받은 일이 엊그제라 드러버서라도 돈 모아 하나 살까 고민 중에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생각 에 매주 로또 라도 한 장 사야 마음에 위안이 될 것 같아  부리나케  복권 판매점으로 달려가 로또 두장을 사고 나니 그야말로 행복하고 은혜로운 마음으로 가득 찼다. 가끔 좋은 꿈이나 꾸면 살까 당첨 그런 거 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늘 생각했던 나였는데 로또를 사고 나니 나의 버킷 리스트 중 이루지 못한 꿈들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한 거다. 마침 얼마 전 받은 백내장 시술 덕분에 시야도 깨끗해진 뒤라 뭔가 모를 자신감 때문일까 원색의 아름다운 세상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못 이룬 여행의 꿈을 마치고 싶었다. 그러면서 문득 떠오른 곳이 이탈리아 북부의 돌로미티였다. 10여 년 전인가 한 달 넘는 이태리 여행 일정 중에 끼어 있던 곳이었는데 꼬모의 산동네 마을버스와 접촉사고로 인해 렌터카 회사에 가서 차도 바꾸고 사고처리 하느라 날자를 까먹는 바람에 일정에서 날아가버린 도시였다. 볼차노. 담베쵸 등 돌로미티의 그 아름다운 풍경을 못 보고 돌아가는 실망감이 너무 컸기에  언젠가 꼭 다시 찾아 오리라는 마음을 다지며  허한 마음을 와인으로 달래고 베로나에서 발걸음을 돌렸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얼마동안은 유튜버들이 올린 그곳의 동영상을 보며  미련을 잠재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코로나 등 주변 상황은 급격히 바뀌어갔고 경제적으로나 체력적으로 그 꿈을 감당하기에는 버겁다는 생각에 그 꿈을 잊고 지냈었다. 그런데 로또 한 장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어보는나,  그래 퍼스트클래스 아니 비지니스만 타고 가도 덜 피곤할 거야 그리고 공진단 인가 그런 거 먹으면  모자란 체력에 보탬이 될 거고 그냥 한 곳에서 좋은 경치 바라보며 좋은 와인이나 먹다 오는 거지 하는 이런 허황된 꿈이라도 꿀 수 있다는 것이 지금의 행복한 이 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홍콩 아들집에 가는 5시간의 비행도 피곤해서 딱히 갈 생각도 없는 내가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탄다 이런 이중적인 생각을 해보는 나에게 냉수 먹고 속차리라는 마누라의 일성이 들려올 것만 같아 일단 현실로 돌아가려 한다. 웬만한 사람들보다는 많은 여행을 해봤는데도 아직 여행에 목말라 있는 건 역마살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유럽의 와인투어나 RV차량으로 미대륙횡단의 꿈은 이미 접었고 지금은 방콕의 어느 뒷골목에서 꿰떼우 국수나 팟카파오무쌉에 똠얌꿍이라도 먹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나의 마음이다. 며칠 전 고교 5년 선배 건강이 안 좋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드렸더니 얘기 중에 자네도 팔십 넘으면 체력이 확 달라질 거라 했다. 70 중반인 내가 지금은 못 느끼지만 분명히 그 시기가 나에게도 곧 찾아올 거라는 생각을 하니 조급하고 암울해진다. 열대야 때문에 글이나 좀 써볼까 하고 책상머리에 앉으니 방충망에 붙어 있던 매미가 목놓아 울어대며 감성을 파괴시킨다. 시도 때도 없이 울어 대는 요즘 매미들 우리 마누라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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