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캄보디아에 갔을 당시는 우리와 수교가 이루어지기 전이어서 한국 무역대표부 인가만 있을 때였다. 시아누크 국왕과 훈센 총리가 국정을 운영하는 이원화된 정부였기에 허가도 양쪽에서 받아야 했던 불편한 시기였다. 얼마 후 국왕은 군부에 의해 축출되었는데 한동안은 북한에 머믄 다는 소식도 들렸다. 저녁 7시경이면 전기가 나가 집에 자가 발전기가 없으면 선풍기도 못 돌리는 바람에 더위를 피할 수 없어 처음에는 근처 호텔 로비에 가서 시간을 보내다 열기가 좀 식으면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호텔에 가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꽤 보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중고차 판매상부터 카지노를 운영하려는 사람 등 발 빠른 한국사람들로 이미 캄보디아에 진출 했거나 진출 채비를 하려는 사람들을 볼수 있었다.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어떻게 그곳까지 갔는지 버스 유리창에 속초 라든지 구파 발등 그런 스티커나 글씨를 그대로 붙인 채 돌아다니는 버스를 흔히 볼 수 있었고 한국의 유치원 가방을 든 아이들이나 우리 예비군복을 입은 사람들도 보여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친근감마저 들었다. 그리고 프놈펜의 느낌은 지난 공산정권 크메르루주가 200만 양민을 학살한 킬링필드 최악의 사건이 언제 있었냐는 듯 그저 평온해 보였다. 캄보디아의 상징 앙코르 왓이 있는 씨엠립은 프놈펜에서 북서쪽으로 300km 정도 떨어진 곳이라 비행기나 배로만 갈 수 있었는데 당시 배편은 가는 도중 해적을 만날 수도 있다는 바람에 대부분 비행기를 이용했다. 특히 겨울철에는 수많은 유럽 단체관광객들로 인해 비행기 좌석을 구한다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기 때문에 한 번은 여러 사람들과 군용기를 전세 내어 공수부대원이 된 기분으로 타고 간 적도 있었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중하나인 앙코르 왓(Angkor Wat)과 앙코르 톰(Ankor Thom)은 정글의 은둔자 또는 신들의 도시라 불리며 프랑스의 박물학자 앙리 무어에 의해 540여 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여간 말로는 이루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그곳은 꼭 한 번 방문해 볼만한 곳임에는 틀림없었다. 처음 앙코르 왓을 가기 전에 내쇼날 지오그래픽 책자에 나오는 사진 한 장을 보게 됐는데 한밤중 환한 모닥불 앞에서 군인들이 쥐를 구워 먹는 장면이었다. 동남아 몇몇 나라에서 쥐를 먹는다는 얘기는 들어 봤지만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약간의 전율을 느끼며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 당시 앙코르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르며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복원에 힘쓰고 있었는데 그때는 어디던지 들어가고 올라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 통제된 구역이 많다고 들었다. 또한 그 당시 외곽에서 발견된 새로운 유적지는 총을 가진 군인과 가이드의 안내로 가보기도 했으며 앙코르 톰에 있는 바욘 사원에 부처님 얼굴이 새겨진 거대한 석상 아래 동굴에선 오렌지색의 승복을 입은 스님이 부처님 앞에서 무언가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크메르 왕조의 찬란함과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그곳이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변했을 것 같은 궁금함 속에 그 아름다운 도시가 영원히 잘 보존되기를 간절하게 기원한다. 밀림 속에서 자야바르만 7세가 코끼리를 타고 전쟁에 나가는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을 떠올려 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도 목에 두르고 다니는 수건의 바둑판 무늬는 킬링필드 영화 에서의 강렬한 충격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역사적으로 얽히고설킨 태국 이나 캄보디아 그리고 미얀마. 라오스는 오랜 고난의 세월을 견디어온 민족들로 말이나 생활문화도 비슷한 것이 많았으며 메콩강을 끼고 각자 살아가는 지금의 그들을 바라보며 앞날에 행복만이 가득하길 바랬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느낀 거지만 "(주유천하)周遊天下 해보니(오역 미진)吾亦微塵이라"는 서예가 남석 이상조 선생의 글에서 보듯이 내가 잘난 줄 알고 세상을 돌아다녀 보니 나는 작고 볼품없는 먼지 같은 티끌에 불과하더라는 그 글에 깊이 공감하며 덧붙인다면 인생엔 답이 없고 역사 속 많은 나라들의 영화도 물거품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