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사는 세상
일 년 전에 입주한 이 아파트는 H 건설에서 만든 1800 세대 규모의 신축 아파트 다. 우리가 이곳으로 이사 온 이유는 전에 살던 곳이 오래되다 보니 이것저것 고장이 나 손 봐야 할 곳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이사가 우리 생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이사를 결심, 새로 분양을 받아 오게 됐다. 그동안 잘잘한 하자보수는 그러려니 하며 지내왔지만 정작 해줘야 할부분은 6개월이 넘도록 해결이 안 되었기에 결국 깐깐한 집사람 비위를 건드리고 말았다. 며칠 전인가 식탁 위에서 커다란 달력 뒷면에 매직으로 뭘 쓰고 있기에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건설사를 향한 시위용 피켓을 만들고 있었다. 당장 생활에 큰 불편이 없으면 좀 더 기다려 보자고 했지만 집사람 성격상 그런 게 용납될 리가 없었다. 나도 뭔가 거들어야 할 것 같기에 문구를 좀 수정해 주었고 다음날 아침부터 우리는 아파트 정문 입구에서 피켓을 들고 일인 시위를 시작했다.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 아파트는 아침이면 유치원 등 각종 스쿨버스 타는 장소 앞이 북새통을 이룬다. 그곳 옆에서 머리허연 늙은 부부가 피켓을 들고 있는데도 애들을 데리고 나온 엄마들은 별 눈길조차 주질 않았고 가끔 나이 든 사람들 몇 명만 무슨 내용인가 들여다보고 지나갔다. 3일째 되던 날 건설사 하자보수 센타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곧 하자 부분에 대한 조치를 취할 테니 일인 시위는 그만두셨으면 한다는 얘기였다. 얘긴즉은 명품 아파트를 만들려고 하는데 이미지에 손상이 간다는 그런 말이었다. 곧 고쳐 준다니 일단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실속도 없이 이름이나 겉만 번지르르하다고 명품 아파트가 되는 건 아닐 텐데 지나가던 강아지도 웃고 갈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피켓을 보고도 무표정한 젊은 엄마들의 얼굴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속 빈 강정이니 빛 좋은 개살구 등 이런 경우를 표현할 말들은 많지만 어찌 됐던 그들 생각에는 내실보다는 일단 아파트 이름값부터 올리는 게 우선 인 듯 보였다. 늘그막에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바로 고쳐주겠다고 하니 더 이상 하자에 대한 문제 제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얼마 전 홍콩에서 살고 있는 손주 녀석들이 할아버지 테니스나 배드민턴 칠 줄 아느냐고 문자가 왔다. 못한다고 그랬더니 김이샌 모양이다. 그동안 아파트 내에 뭐가 있는지 별관심이 없었는데 손주들이 오면 함께 어울릴만한 아파트 내 시설에 대해 좀 알아보려 모처럼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농구나 배드민턴 코트등 그런대로 괜찮은 시설들이 보였고 단지 전체가 금연 구역으로 지정 돼있어 그런 거는 환영할만했다. 밖에도 여러 군데 운동 시설이 보였지만 젊은 엄마들로 가득 찬 실내 피트니스 센터를 가보니 활기 넘쳐 보여 좋았고 골프 연습장이나 탁구장 에 거기다 사우나 시설 까지 있었다. 결국 주민들 관리비에서 지출되는 비용 일텐데 어차피 운영비를 전세대가 다 내는거라면 떡 본 김에 다시 골프채를 다시 잡아 볼까 하는 마음이 끓어올랐다. 그러나 쓰던 골프채는 이미 남들에게 다 줘버린 데다 손 놓은 지 10년도 넘었으니 몸이 굳어 이제 다시 그립을 잡는다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형 말년에 괜히 무리하지 말라는 후배의 충고에 생각 자체를 아예 접고 말았지만 그 말인즉은 걷는 운동이라도 제대로 하라는 의미 인듯했다. 그러고 보니 하자 보수만 제대로 되고 정 붙이고 살다 보면 그런대로 살기는 괜찮은 아파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시골스런 분위기가 남아있어 좋은 게 우리 동네다. 그리고 이런 한갓진 곳에 스타벅스가 들어서 있는 게 신기했다. 분명 앞을 내다보고 했겠지만 입지 선정을 누가 하는 건지는 몰라도 그 선택 과정이 너무 궁금했다. 스타벅스 매장 음악은 어느 곳이나 일률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대로 들을만한 선곡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경전철이 달리는 바깥 풍경 그 아래로 보이는 논밭 가운데서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벚꽃나무들은 흐르는 음악과 어울려 몽환적 분위기 마저 느끼게 된다.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늘 커피가 싱거워진다는 느낌에 샷을 하나 더 추가해 마시긴 하지만 이 날따라 진한 에스프레소를 맛보는 그런 느낌이 들어 좋았다. 그러면서 이 동네가 좀 더 시골 같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정도 분위기 만이라도 오래 유지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사람도 별로 없어 조용한 데다 따듯하다 못해 덥기까지 한 매장 안 의자에 깊숙이 눌러앉아 커피향에 음악과 어울리다 보니 몸과 마음마저 노골노골 해졌다. 마치 태국 치앙마이 어느 조용하고 한적한 골목 카페에서 정신적으로 편안하고 평화로운 여유를 즐기던 그 지난 기억들을 불러냈다. 커피를 마신 후 새로운 기분으로 밖을 나서니 강풍이 불어온다. 이건 따스한 봄바람이 아니라 봄을 못 오게 막으려는 듯한 아주 차가운 겨울바람 같았다. 내일 이면 날이 다시 풀린다던데 벚꽃들이 이틀만 잘 견뎌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움츠리고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논밭과 과수원 그리고 시골에서나 보게 되는 옻닭이나 염소탕집 그리고는 한가한 편의점등 그런 거 말고는 주위가 전부 * 아파트 아파트뿐이다. 그런데 과연 명불허전이라는 말을 들을만한 그런 아파트가 있긴 있는 걸까! 겉이 아니라 속이 따듯한 내실 있는 그런 아파트 말이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이 아파트도 주민들 소원대로 꼭 명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깃털이 하나둘 빠져 더 이상 날지 못하는 늙은 기러기처럼 남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야 하는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렴풋이 보이는 거 같다. 그래도 죽을 때는 용인이라는 말 때문인지 이런 동네서 臥鯨 (은둔 중인 고래)처럼 지내는 지금 이대로가 평화롭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