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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 안에서 나를 찾아봐.

고래가 사는 세상

by 구일권

TV에서 터미널 이란 영화를 봤다.

벌써 이게 몇 번째 인지도 모르지만 보면 볼수록 그 느끼는 감정은 내게 배가 되어 돌아왔고 나를 끝없이 회면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영화였다. 물론 좋아하는 배우 톰 행크스 때문 만은 아니고 이영화는 내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오만가지 상상과 느낌을 겹치게 만들었다.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배우들 중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나를 홀리게 만드는 배우가 두 사람 더 있다.

" 더스틴 호프만과 모건 프리먼이다. 뭔가 내 마음의 움직임을 심하게 다루는 그들을 떠올릴 때면 나는 이미 그들의 표정 속에 스며 들어가고 있었다. 특히 빠삐용 이나 쇼생크 탈출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들의 영혼이 내게 옮겨 붙은 듯 한동안 벗어날 수 없어 나를 그냥 그들에게 맡겨 버렸다.

영화 속의 주인공이 오랜 시간 공항 터미널에서 지내며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축소판이나 마찬가지 라는 생각 때문일까! 우리는 인생에서 늘 보내고 맞이하는 일들을 반복하며 살고 있는 것처럼 터미널 바로 그곳도 그런 축소된 공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립된 공간 안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려는 의지와 타인과의 교감으로 희망을 이어가는 그들은 나의 심적 공감을 극대로 끌어올렸다.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지만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붙들고 품위를 지키며 삶을 버텨내려는 그들에게서 나를 다시 되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장면들로 이어져 갔다. 공항 터미널은 어떤 곳일까

궁금한 곳이긴 했지만 그곳은 우리가 상상할수 없을 만큼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복잡한 시설들이 엉켜 있는 곳이라는 짐작만 해볼 뿐이다. 가끔 공항을 가게 될 때면 바닥에 자리를 잡고 한껒 편안한 자세로 길게 들어 누운 여행자들을 보게 된다. 전에 나도 그런 경험이 있지만 대부분은 환승 승객으로 연결 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저러다 깊이 잠들면 어쩌지 하는 우려 속에 나 같은 경우는 큼직한 커피 한잔에 몸속의 먼지를 털어 내듯 someone like you 같은 그런 음악들로 지루함을 달랬다. 여행 경험은 많아도 늘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는 넋 놓고 있다가 지갑이나 여권을 잃어버린다거나 시간 착오로 곤경에 빠지고 마는 사람들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 중 사소한 부주의로 인해 큰 낭패를 겪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 속에 늘 신경은 날카롭게 깨어있기 마련이었다. 그 때문인지 난공항만 가면 늘 허기가 졌다. 비행기 이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밥을 줄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뭔가 배를 채우고 떠나야 될 것만 같은 조바심에 늘 공항 터미널 안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게 되는데 그건 또 무슨 증후군 인지 모르겠다.

옛날 완행열차가 잠시 정차하던 역에서 빠르게 말아주던 그런 가락국수와는 느낌이 다르겠지만 가끔 인천공항 터미널에서 먹는 짬뽕맛은 각별하기에 한 그릇을 비우고 나서야 뿌듯한 마음으로 비행기를 타는 게 습관처럼 돼버렸다. 천태만상인 터미널 안의 풍경은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다. 모든 게 자동화된 건 물론이고 수속도 키오스크에서 직접 하는 등 나와는 점점 멀어져 가는 다른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얼마 전 비행기 승무원으로 일하는 어느 작가분이 비행기 안의 승무원들 휴식공간인 벙커라는 곳에 대한 글을 올린 걸 읽어 보았다.

비행근무를 마치고 나오는 제타죤스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그들의 애환을 담은 글 속에서 우린 모두 겉모습에 취해 살아가는 건 아닌지 물어본다. 공항이나 항구에 대한 감흥이 옛날 같지는 않지만 오래전 개그린 버스가 떠나는 고속버스 터미널에서도 우리는 이별의 눈시울을 적셨다. 지금은 드문 경우지만 전에는 많은 환송객들로 인해 공항터미널은 늘 붐볐다. 이제는 세월도 흐르고 감정도 메마른 탓인지 공항에서 들리던 찬송가 소리나 울고 웃는 모습들은 모두 세월의 뒤편으로 물러난 듯 보였다.

가끔은 예기치 못한 일로 비행기 연결 편이 취소되어 모두가 잠든 터미널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때는 인적이 드문 밤길을 걷다 마주친 낯선 거리와도 같았다. 알래스카에서는 화산폭발 때문에 이과수에서는 악천후로 게트윅에서는 정비관계로 본의 아니게 하루를 더 묵게 되는 일들은 여러 번 있었다. 물론 항공사에서 잠자리를 제공해주긴 하지만 늦은밤 어디로 끌려 가는듯한 그런 기분마저 들었다.이건 다른 경우지만 한 번은 미국서 출발 도쿄를 거쳐 서울로 오는 비행기였는데 도쿄에서 오버부킹이 되어 그러니 도쿄에서 하루 더 머무를 수 있는 승객을 찾는 일이 있었다. 생각끝에 내가 자원했는데 다들 떠나고 나만 터미널에 남고 나니 괜한 짓을 한건 아닌가 잠시 후회도 했지만 동경 사는 친구에게 연락이 닿아 오랜만에 같이 한잔하고 다음날 비행기로 온 적도 있었다. 항공사에서 받은 체류 비용으로 모처럼 친구도 만나고 나리타공항 터미널에서는 먹고 싶었던 산사이 소바와 초밥까지 먹으며 알찬 하룻밤을 보냈던 기억이 새롭다.


여러 나라의 많은 공항들을 거치다 보면 그 나라마다의 향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체취 또한 여러 다름을 느낄 수 있다. 크고 편리한 시설을 갖춘 공항도 많지만 작아도 사람 사는 느낌이 나고 마음 편해지는 그런 공항은 아직도 많은 곳에 남아 있다. 이제 대부분의 시간을 좁은 터미널 같은 집에서 지내는 내가 공항을 나갈 일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커다란 가방이 찢어질 듯 먹을 것들로 가득 채워 홍콩으로 돌아가는 며느리와 손주들 때문에 가끔 공항을 나가게 되는데 모처럼 보게 되는 아름답고 반듯한 승무원들과 지나칠 때 저들과 함께 비행한다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오랜 터미널 생활 끝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는 이면에 마음의 연인을 잃고 돌아가게 되는 톰 행크스의 표정 속에서 나는 아련하고 짜릿한 실연의 아픔을 함께 맛보았다.

나갈 때나 들어올 때 거치는 터미널, 그곳은 내 마음의 안식처였고 늘 나를 설레게 만드는 연인 같은 곳이기도 했다.


아주 오래전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하안거 중인 나를 깨우는 황진이 같은 어느 작가님 덕분에 나는 다시 자세를 고쳐 앉는다. 한여름밤 꿈속에서라도 깨달음을 얻으려 했는데 도로아미 타불이 된 나는 잠시나마 터미널 안에서 그답을 찾으러 나섰다.

지금도 화살처럼 지나가는 하루하루인데 80이 되면 빛처럼 빠르다 하니

쉬지 않고 흘러간 지난 세월의 아쉬움에 한없이 고개를 떨군다. 그러나 여러 번 보아도 처음 보는 것 같은 그런 영화들이 남아 있어 행복하고 흐트러지려는 내 마음도 refresh 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기억할 수 있는 명장면은 오랫동안 머릿속 필름안에 지니고 살게 되나 보다. 나도 히말라야를 볼수 있는 어느 작은공항 터미널 의자에 기대어 오래 머물지 못하고 흘러가는 세월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런 꿈속에서 노니는 나는 오늘도 보라초가 되어 첼로의 아다지오 선율에 흐르는 시간을 아껴 쓰려 애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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