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에서 회장님으로

취경전

by 구일권

사장님하고 부르면 다들 쳐 더 보는데 안 돌아보는 사람은 전무였다는 그런 옛날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70~80년대만 해도 대기업 회장이나 사장이 해외출장 시에는 영화에 나오는 조폭들처럼 회사의 많은 임원들이 공항에 나와 일렬로 도열해서 세를 과시하는듯한 광경이 연출됐다. 갖다나 비좁은 공항에서 해외로 떠나는 교인을 위한 기도와 찬송가 소리에 한쪽은 중동지역으로 떠나는 해외근로자 단체와 그들의 가족들이 한데 엉켜 호루라기 불고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80년 도말쯤 인가 어느 타이어 회사의 각국 지점장 회의가 마닐라에서 있어 그 모든 일정의 진행을 내가 맡은 적이 있었는데 본사 직원 포함 40~50명 되는 인원들이 움직이는 행사였다. 그들의 항공권부터 호텔. 식사. 회의장소. 외부 일정 등 그들의 주문대로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 작은 문제도 생겨서는 안 되는 간단한 일들이 아니었다. 마닐라로 출발하기 며칠 전 회사 임원이 나에게 사장님이 마닐라 도착 시 최고급 자동차에 공항부터 호텔까지 에스코트해줄 여러 대의 오토바이와 많은 기자들을 불러 모으는 일을 내게 부탁한다고 했다. 당시 관광지에서 경찰 배지도 팔아먹는 경찰이 있을 정도로 한심한 그런 시기였기에 전부터 알고 지내던 화교 회사를 통해 그곳의 실력자들을 동원하니 모든 게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하여간 도착한 날 비 오는 길을 노란 우비를 입은 오토바이 6대가 호텔까지 에스코트했는데 국빈방문 같은 그 광경이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임원들의 충성으로 인한 지나친 의전은 시골영감의 백구두 같아 보여 조금은 민망한 연출이 아니었나 싶었다. 하여간 3일간의 회의는 아침부터 밤 12시를 넘길 정도로 격렬하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는데 우리 타이어를 수출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대단해 보였다. 멀리 남미에서 온 사람부터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에 걸렸다 회복되어 입술이 허연 상태로 먼길을 날아온 그들에게서 해외에서의 힘든 생활은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모든 일들을 무사히 처리하고 마닐라를 떠나기 전 그들과 골프와 낚시도 즐기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는데 그들도 이젠 모두 퇴직하여 나와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리라 생각된다. 옛날 여권을 보면 내용을 잉크펜으로 적은 것도 있고 스탬프 찍을 일들이 많아 용지를 연결하여 쓰다 보니 출장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의 여권을 보면 두툼한 게 일수 아줌마 치부장 같이 보였고 당시 일반인은 한 번만 사용 가능한 단수여권인 데다 소양교육. 반공교육. 예방접종증명서 등을 필해야만 출국할 수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기운 빠지는 일이었다. 일반인의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던 시절 대기업 중역 이상 정도만 복수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는데 어느 대기업 총무과 직원은 사장님 대신 반공교육이나 예방주사까지 맞는 코미디 같은 일들도 있었다고 한다. 며칠 전 신문에 베트남 틱낫한 스님이 입적하였다는 기사를 봤다. 세계적인 명상 지도자로 프랑스에서 오랜 망명 생활을 하신 분인데 나와의 작은 인연도 있었다. 전두환 정부 시절인가 이후락 씨가 조계종 불교 전국 신도 회장 일 때인데 거기 임원인 분이 신도회에서 단체로 유럽여행을 가고 싶은데 유럽의 불교와 관계된 곳에서 초청장을 받을 수 없겠냐는 부탁에 마침 내가 파리에 간 김에 수소문 끝에 그곳에 계신 틱낫한 스님으로부터 단체 초청장을 받을 수 있었던 적이 있었다 하여간 여권을 꺼내면 구경 좀 하자고 몰려들던 그런 시절을 살았다 생각하니 참 허무하고 황당한 마음만 남아 있다. 80년대 초 여의도 L 그룹에 있을 때인데 어느 날 사장이 부르더니 회장님 모시고 동남아 지점들을 다녀오라는 거였다. 그룹 비서실도 있는데 왜 그러냐고 했더니 이번 여행은 회장님의 K고 동창 부부 여행이라 여행 경험이 많은 내게 부탁하는 거라고 했다. 잘해야 본전 이란 생각이 들어 찝찝한 마음으로 스케줄을 보니 홍콩부터 일본 까지 다섯 나라를 거치는 보름간의 일정이었다. 그렇게 회장 부부 등 8명과 함께 출발했는데 나는 그때 처음 퍼스트 클래스를 타볼 수 있는 영광을 누렸지만 회장이 스튜어디스를 놔두고 내게 이것저것 시키는 바람에 일등석의 기분은 전혀 느껴 보지도 못하고 다녔다. 회장 일행이 고급 호텔 풀사이드에서 럭셔리한 식사하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는 나 자신이 처량 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나 자신을 다잡을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됐는지도 모른다. 어느덧 여행의 막바지에 들어 지쳐 갈 무렵 동경에 도착했는데 회장이 자기 보다도 나이가 훨씬 많은 동경지점장에게 내일 골프를 나가려 하니 새로 산 골프 바지를 줄여 오라는 거였다. 회장의 그런 행동에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얘기가 이런 건가 하는 생각 속에 은근히 열 받아 방에 돌아와 혼자 술을 마시며 회장을 씹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기 방으로 오라는 회장의 전화를 받고 가보니 회장 친구들이 내게 그동안 수고했다며 봉투를 주었고 회장까지 따로 봉투를 내게 주었다. 방에 돌아와 열어보니 에구머니나 나의 4~ 5개월치 봉급 정도 되는 US 달러가 들어있었다. 고진감래( 苦盡甘來)란 표현을 쓰긴 좀 그렇지만 회장 일행과 여행 중 느꼈던 불필요한 감정은 눈 녹듯 사라지며 나의 간사한 마음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어찌 됐던 그 여행에서 느낀 건 내가 비서실 같은 곳에 근무할 체질이 아닌 건 분명했다. 명문대 출신이지만 노가다 회사 회장답게 욕은 끝내주게 하던 회장님이었는데 그 회사를 그만둔 지 한참 되던 어느 날 골프장 클럽 하우스에서 구 사장 공 잘 맞느냐고 웃던 C회장과의 해후였고 그런지 몇 년 후 회사가 풍비박산 났다는 소식에 마음은 안 좋았다. 화무는 십일홍 이요 달도 차면 기운다(花無十日紅 滿月虧)는 그 말에 꼭 공감할 수는 없지만 김우중 씨를 비롯 그시대 회사를 이끌었던 오너들은 한마디로 격동의 세월을 살다 사라진 우리나라의 역군들이었다. 내가 군에 복무할 때는 사단장 계급이 별 하나였는데 지금 사단장은 별둘이 됐듯이 요즘은 모든 호칭이 사장님에서 회장님으로 업그레이드된 거 같았다. 그러나 실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그런 회장님이나 사장님을 부르는 호칭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개나 소나 다 회장님이라 부르는 꼴불견인 세상이 되어 버렸다.'하염없이 내뿜는 담배연기 속에 아련히 떠오르는 그 여인의 얼굴'을 부르는 진고개 신사가 되어 지난날들을 떠올려 봤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영화 같은 미래는 행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