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초동 지금 명보극장 자리 근처에서 태어난 나는 피난시절 에는 부산 동래 수안동에서 살았고 그 후 군인 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대구. 대전. 춘천 등을 거쳐 초등학교 일 학년만 두 군데 다닌끝에 1957년인가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 와서 다닌 장충과 광희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지금 신라호텔 주변에서 아카시아꽃이나 벚찌를 따먹으며 남산에서 놀았고 겨울엔 동국대 근처 빨래터 개울가에서 썰매를 지치며 놀았는데 추운 겨울 동상에 걸려 손이 터지면 어머니가 글리세린을 발라 주시기도 했다. 동상의 정도가 심할 때는 여러 민간요법을 따라 해 보다 정 안되면 어머니가 남대문 시장에서 꿩을 사다 그 골을 상처부위에 바른 뒤 손을 숯불에 쪼이면 금세 부기가 빠지며 통증도 깜쪽 같이 사라지는 그야말로 신비의 민간요법이었으며 남은 꿩고기로는 만두를 만들어 먹었다. 하여간 두 번의 전학 끝에 지금은 학교가 없어졌지만 현재 동국제강 본사가 자리 잡고 있는 청계 국민학교에서 졸업하게 되었다. 지금은 명동으로 이사했지만 학교 옆에는 아침마다 지질한 냄새를 풍기던 하동관 곰탕집이 있었고 제창국 한의원 등이 있었던 지금 을지로 입구가 바로 그 자리였다. 처음엔 세검정 집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을지로 1가에 있던 이북오도민 촌안에서 살던 과외 선생님 집에서 공부가 늦게 끝나는 바람에 무교동 지금 코오롱 빌딩 근처 한옥에 살던 친척집에서 2년 동안 지내며 학교를 다녔다. 일주일마다 들리는 우리 집은 자문 밖이라 불리던 세검정에 있었는데 집으로 가는 길은 큰 바위들이 많고 맑은 개울물이 흐르는 정말 아름다운 동네였다. 지금 청와대 옆 칠궁을 지나 자하문 고개를 넘어서면 그야말로 능금꽃, 복사꽃이 활짝 핀 무릉도원이었으며 우리 집을 지나면 지금의 평창동, 구기동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청계천변을 따라 동대문 전차 종점까지 갔고 어떤 때는 용두동 미나리밭 까지 내려간 적도 있다. 청계천을 내려가다 보면 약장사의 바이올린 소리도 들렸고 금붕어 장사, 대나무에 걸린 염색천들이 늘어져 있었고 미꾸라지도 잡히던 그런 곳이 청계천이었다. 동대문에서 뚝섬까지 다니던 기동차를 타고 수영하러 광나루까지 다닌 적도 있던 기억 등을 간직한 곳인데 많은 변화를 거쳐 지금의 청계천이 되었지만 조금만 더 넓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동대문을 지나다 보면 지금의 신설동 근처에서 신당동으로 이어주던 영미 다리와 검정다리가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신당동 살 때 어머니와 가끔 들리던 영미 다리 근처 만미당 아이스케키 집에서 맛본 시날 코라는 탄산음료는 달콤하고 강력하게 톡 쏘는 맛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었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로마 여행할 때 우연하게 어느 상점에서 보게 되어 잠시 어린 시절을 다시 떠올려 보게 되었다. 지금 황학동 벼룩시장 안에 있는 동묘는 관운장을 모신 사당인데 우리들이 자주 가서 놀던 놀이터였고 방과 후엔 만화방에서 산호의 라이파이나 칠성이 경감 등 그런 만화를 보며 상상의 날개를 펼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 무렵 일어난 4.19 의거 당시는 학교도 휴교를 했던 터라 매일 아침마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부패한 이승만 정권을 타도 하자는 수많은 인파의 데모대를 따라 길가에 벚꽃이 활짝 핀 청와대 입구'그 당시 경무대'까지 따라간 적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들은 총소리에 쓰러지는 사람들에 놀라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던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동대문 운동장 수영장도 담 넘어 다니던 시절 왕십리 쪽에 있던 광무극장과 을지로 6 가 계림극장은 내가 단골로 다니던 곳이었다. 영화가 보고 싶으면 아무 때고 극장 입구에 가서 극장에 들어가는 아주머니 뒤에서 엄마를 부르며 뒤쫓아 묻어들어 가는 게 나의 수법이었고 영화배우 최무룡이 부르던'나뭇잎이 푸르던 날에 뭉게구름 피어나듯... 그런 노래와 영화 장면에 눈물짓던 나의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그 당시 집에 오는 손님들은 설탕을 사들고 오는 사람들이 많아 수박이나 토마토에 설탕을 뿌려 먹었고 찬물에 설탕과 식초를 탄 물은 그 맛이 콜라 이상이었는데 이제 와서 설탕이 몸에 안 좋다고 하니 참 난감한 일이다. 석빙고 아이스케키를 빨아먹으며 행복에 겨워했던 시절 좌판에 찍찍 늘어진 해삼, 대나무로 따르륵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던 당고 장수, 찌그러진 양재기로도 바꿔주던 달걀 아이스케키 아저씨 등 그런 모든 기억들이 잊힐까 두렵다. 오래전 일본 후지산 근처 다이요라는 오래된 골프장엘 갔는데 거기서도 오랜 추억을 만나볼 수 있었다. 기계 위에 얼음을 얹고 갈아내어 색색 물감을 뿌려주던 빙수였다. 어렸을 때 흔히 보던 얼음 빙(氷) 자가 선명한 파란색 빙수 기계 가 왜 우리 눈앞에서 다 사라져 버린 것일까. 홋카이도 지방 열차 내에서 난로 위에 오징어를 구워 먹는 그런 모습들은 오래전 우리 에게도 있던 것들이었는데 우리는 기억 속 에만 남아있지만 소소한 그런 옛것들을 오래 간직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부러웠다. 시청 플라자호텔 자리에는 유도 학교가 있었고 그 뒤로는 남대문 시장 앞까지 차이나타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옛날엔 아편 골목 이라고도 불리었다는 그 길 어느 중국집에서 겨울날 아침에 본 만투육( 커다란 흰 빵에 오향장육 같은 고기를 싸 먹는것) 에서 모락모락 김이나는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침이 저절로 넘어간다. 아버지와 같이 간 중국 목욕탕에서 친구분들과 청요리에 빼갈(고량주)을 시켜 드시던 모습 등이 눈에 선한데 그러고 보면 우리 눈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아쉬움과 삭막함만이 남는다. 그리고 해외에서 전차가 다니는 걸 볼 때면 우리도 불꽃을 튀기며 쉰 목소리를 내는 전차가 있었는데 하는 그리움으로 남아 있고 전에 산토리니 피라 마을에서 바닷가까지 오르내리는 당나귀를 보면서 서울 시내에도 조랑말들이 커다란 짐이나 연탄 같은걸 싣고 달리던 때가 있었다는 게 새삼 떠오르며 그 조랑말 들은 다들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 정겨웠던 그때 모습이 그립다. 금호동한 강변 철길 아래서 뱀장어 낚시하던 사람들과 마포나루터에서 자갈 실은 배에 매달려 밤섬까지 수영하던 시절 등이 그나마 남은 기억들인데 그런 기억마저 가물가물해지는 지금 이런 추억들을 언제까지 간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겨울밤 야경꾼의 딱따기 소리가 사라지면 메밀묵, 찹쌀떡 장수의 청아한 목소리가 우릴 행복하게 만들었고 밤사이 연탄가스를 맡아 머리가 어지러울 때 어머니가 떠다 주신 동치미 국물을 들이켜던 그 기억 등, 모두가 넉넉지 못한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거지는 내치지 않았던 인정이 넘치는 살만한 세상이었다. 춤추는 추억만이 남게 되는 雪泥鴻爪 (설니홍조)와 같은 인생이지만 사는 동안만큼은 보고 싶은 사람들 자주 만나 옛이야기라도 나누며 지냈으면 좋겠다는 요즘의 시간이다.
설니홍조: 눈 위의 기러기 발자국도 눈이 녹으면 흔적도 없이 살아지듯이 인생의 자취도 마찬가지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