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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흔히 밸런스 게임을 하곤 한다. A vs B의 상황을 가정하고 두 선택지 중 차선을 고르게 만든다. 선택지 간의 균형이 더 잘 잡혀있을 수록 사람들은 50 대 50으로 첨예하게 갈린다. 무엇인가를 가정하고 강제적으로 선택한다는 점에서 이 게임은 굉장히 큰 고민을 준다. 하지만 인생은 그런 식으로 살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은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으로 대한민국이 갈라지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모두가 보상과 고통을 동등하게 분배받는 집단주의의 북 또는 고통을 통해 일한만큼 보상받는 개인주의 남. 소설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인 광장과 밀실의 대조되는 개념으로 정립해서 이해해도 무방하다. 어디로 가야 행복을 찾을 수 있겠는가? 지금 생각해보자면 고민할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선택할 수 있는 일도 아니겠지만 남자라면 20대 청춘을 군대에서 온전히 허비하고 싶지 않은 이상 북한을 고를 이유가 없다. 단순히 의식주 수준을 포함해 경제적인 상황 및 GDP만 보아도 현재는 누구나 남한에 살고 싶을 것이다. 탈북이라는 단어는 익숙해도 탈남은 생소하다.
하지만 70여 년 전, 국가가 형성되던 초창기에는 오히려 새로운 삶을 다 같이 살아보자는 의욕으로 인해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던 시절도 있다. 하지만 우리 윗 세대들이 이루어 낸 '한강의 기적' 덕분에 현재 지금 대한민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나라는 놀랍게 발전했다.
앞서 말한 이야기는 그 당시에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혼란스러움 속에 이명준은 남과 북에서의 삶 모두를 회상해본다. 남한에서는 '밀실'은 있지만 연대의 공간인 '광장'이 없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각자의 사유 공간은 존중되지만 모두가 무엇인가를 함께한다는 것은 찾기 어렵다. 나 역시도 대학교 행사나 외부활동을 잘 참여하지 않으며, 만약 하게 된다면 그것은 나의 스펙을 위해서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북한에서는 국가가 만들어 놓은 '광장'은 존재하지만 개인에게 허용된 '밀실'은 매우 제한적이다. 과한 통제로 사적인 대화마저도 제한되고 검열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나에게도 통제는 답답하고 목줄 같은 느낌이다. 내 자아를 어느 정도 버리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기계의 부품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높은 가치를 포기해야 하는 것만 같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일조차 과거라면 금기였다는 사실은, 나를 잠시 멈추게 만든다.
소설의 시점으로 돌아오자면, 모든 것을 잃고 혼자가 된 주인공은 다시 큰 고민에 빠진다. 이제 밸런스 게임은 끝났다. 굳이 차선을 골라야 하는가? 생각의 폭을 크게 가지면 다른 해결책이 나올 수 있을 것만 같기도 하다. 이에 이명준은 아예 다른 선택지를 고려한다. 한국에서만 살라는 법은 없기에 제3국으로 향한다. 작품에서의 제3국은 인도였지만, 꼭 그 나라일 필요는 없었다. 해외에서 일자리를 얻고, 소박한 삶을 꾸리고, 먹고살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이 열린 장소의 의미이다. 그렇게 그는 인도로 가는 배에 타게 된다. 그렇지만 이미 여러 번 무너졌던 그는 안타깝게도 결국 마지막 자유를 찾아 '푸른 광장'인 바다로 빠진다. 당시 이념 대립 문제와 어디에 가서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학습된 상실감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자기 입으로 아무리 똑똑하다고 말한 들,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지’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당시의 사고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한 차원 높은 통찰이었다.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정말 할 수 없는, 하기 어려운, 답이 없어 보이는 문제들이 생기는 순간이 존재한다. 이 '제3국'은 그런 나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해답은 그것은 양자택일의 문제로 해석하지 않으면 된다. 새로운 해결방안을 끊임없이 고민하면 된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가 있다. (오해하면 안 된다. 죽으라는 것이 아니다.)
이명준이 제3의 해답을 찾으려 했던 것처럼, 나 역시 삶에서 종종 이분법적 고민에 갇힐 때가 있다. 요즘 나의 진로에 관해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을 고민 중에 있다. 전공을 살리자니 적성과 잘 맞는 것도 아니며, 그만큼의 열정도 없다. 좋아하는 일을 하자니 의욕은 생기지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커리큘럼과 로드맵이 없다. 미리 말하자면 삶의 정답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굳이 두 개 중에 하나를 고를 필요가 없다. 잘하면서 좋아하는 일도 있고, 그와 정반대의 일도 있다. 잘하지는 않지만 해보고 싶은 일도 있고, 좋아하지만 잘하는지 못하는지 아직 모르는 일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기준을 세워서 정리를 한 뒤, 계획을 세우면 된다.
계획을 세웠다고 인생이 그대로 흘러간다는 보장은 없기에 나는 계획을 잘 세우지 않는 편이다. 대략적인 큰 틀만 잡고 방향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되, 세세한 부분에서 신경 써야 되는 디테일들 중 필수적인 부분만 살리고 밀고 가는 느낌인 것 같다. 그리고 매 순간에 나답게 임한다. 결국 어떤 일을 할 지에 대해서는 나의 가치관과 생각들이 중요한 것 같다. 훨씬 더 풍부한 답변 아닌가? 둘 중에 하나를 골라서 그 까닭을 설명하는 것보다 더 고차원의 사고를 요구한다.
인생을 돌아보면, 그것은 이분법적이라기 보다는 스펙트럼에 가깝다. 이는 화학 시간에 배운 오비탈 개념과도 비슷하며 내가 좋아하는 아이디어이다. 확률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가능성을 함수로 표현할 수 있다. 확률은 그 결과에 대해서만 고려한다면 0 또는 1의 두가지로밖에 생각이 안 된다. 그렇지만 스펙트럼은 그런 방식이 아니다. 색에서도 변화는 그라데이션으로 서서히 나타낸다. 특정 시점에 눈에 띄게 보이도록 변주가 발생하는 이산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흘러가는 느낌으로 이에 동조해야 한다. 어느 시점에 큰 변화를 주면 인생이 단 한 번만에 성공한다? 이런 말들은 사기에 가깝다. 살아가면서 선택한 사소한 것들부터 하나하나 누적되어 그것이 인생의 큰 흐름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포기할 필요는 없다. 가장 빠른 시점인 지금부터 본인의 인생을 한 번 돌아보고 점검한 뒤 재정비해서 나아가면 된다.
나 역시도 글을 쓰면서 더 많이 고민하게 된다. 현실적인 압박과 실패로 인해 숨이 막히는 상황들이 학기 중에도 여러 번 찾아온다. 그럴 때 조금 마음이 힘든 것 같다. 앞으로의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여태까지 나의 스펙트럼은 스스로 느끼기에 만족할 만하며, 운이 좋았던 순간들에 감사함을 느낀다. 향후의 계획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경험하며 20대를 의미있게 보내는 것이다. 문득 어디로 가는지는 생각보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깨달았다. 그곳이 어디든, 그 시공간을 살아가는 주체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