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 머물던 곳
누구나 정말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 누군가의 성격, 행동, 그 순수함에 서서히 스며들며 한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경험은 다들 하나쯤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믿었던 모습이 모두 남을 속이기 위한 기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상실감의 깊이는 어느 정도일까?
직접 체감해 보니 정말 이상했다. 엄청 슬프지도, 밉지도, 화나지도 않았다. 그저 시간이 지나도 살아갈 의욕이 생기긴커녕, 매일이 무기력하고 공허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한 명, 두 명도 아닌 여러 명이 입을 모아 똑같이 말하니, 좋아했던 그 오랜 기간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그 맑은 얼굴로 사람을 그토록 교묘하게 속일 수 있을까. 공부를 하다 말고 너무 답답해서 산책을 했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너무 멀리 와버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전부 다 너와 함께 있었던 곳이었다. 버스정류장, 서점, 벤치. 무의식 깊숙한 곳에 남은 너라는 존재가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 같았다.
순간 울컥했고, 곧바로 자괴감이 밀려왔다.
이런 사람인 줄 알게 되었음에도, 너를 생각하고,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아직 설레고 가슴이 뛰는 내가 징그럽고 밉다. 내 친구에게까지 큰 상처를 줬는데, 고작 속았던 그 모습에 갇혀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미안할 뿐이었다.
내일 학교에서 매시간 마주칠 텐데, 그때마다 외면하고 무시할 자신이 없다. 학교에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집에서도 이렇게 무기력하고 멍한데 학교에 가면 오죽할까.
차라리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아니, 아무것도 알지 못했더라면 편했을까?
예상했던 대로였다. 너를 다시 마주친 순간,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나를 뒤덮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너의 그 천진한 얼굴, 상냥한 말투, 밝고 예의 바른 그 모든 모습이 거짓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셀수도 없는 시간동안 너에게 느꼈던 감정. 그동안의 모든 설렘과 행복, 함께 쌓은 추억들이 한순간에 허상이 되어버린 이 기분을 넌 알까.
솔직히 나는 너의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도 화가 나거나 배신감이 들지 않았다. 그저 나의 진심이 모두 부정당했다는 '허탈감', 오랜 시간 쌓아온 감정의 기반이 무너진 '박탈감', 그리고 삶의 원동력이 사라진 '무력감'뿐이었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운동도, 공부도, 연락도, 만남도. 그저 삶의 목적을 잃은 채 가만히 누워있고 싶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너를 좋아한 그 오랜 시간 동안 이런 모습을 왜 몰랐을까? 내가 알았더라면 너를 바꿀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여전히 난 너를 좋아하고 있을까?"
계속되는 자책 속에서도, 자꾸만 눈앞에 나타나는 너에게 설레는 나에게 거대한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저 이 모든 상황의 짐과 부담을, 네가 아닌 내가 다 짊어지고 싶었다.
오늘도 너를 잊으며, 너의 행복을 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