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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방

유리벽 너머의 시간

by 윤슬

네가 내게 보여줬던 모든 순수했던 순간이, 실은 모두 거짓이었음을 깨달은 그 밤의 공기가, 아직도 이 방 안에 갇혀 있다.


세상은 이미 몇 번의 아침을 맞았건만, 나의 시간은 그 날에 멈춘 채,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너의 실체를 알게 된 그 찰나, 나의 모든 것은 고장 난 시계처럼 정지했다. 닫힌 커튼은 세상과의 단절을 선언하는 견고한 장벽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저 침대 위에 남아, 나를 둘러싼 무너진 믿음들의 잔해와 함께 빛을 피해 어둠 속으로 숨었다. 밖은 맑고 환한 아침이지만, 나가서 너를 마주할까 봐, 아니, 너를 마주치고 싶어 할 나 자신이 두려웠다.


내 친구에게까지 상처를 준 너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나에게 정말 미운 마음이 몰려왔다. 나는 그 자괴감 때문에 몇 분을 더 침대에 묻혀 있었다.


손에 잡힌 핸드폰이 울린다. 친구들의 위로하는 카톡 알림음마저 나에게는 의미 없는 소음으로 들린다.


누구에게도 이 모든 허상에 대해 듣고 싶지 않다. 그때의 나는 그런 너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나의 존재가 정말 싫었다.


하지만 빛은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나를 불러낸다. 나는 부름에 못이겨, 곧내 억지로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앉는다. 이전까지 일상이었던 공부가 이젠 아무 의미 없는 활자의 나열일 뿐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책상 앞에 앉아 너와 보러 갈 영화 약속을 기대하며 뭘 입을지, 영화 보고 무엇을 할지 정말 행복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오늘의 이 책상은, 너라는 허상의 잔해를 마주하는 차가운 거울이 되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잊은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 이전의 나는 꿈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오늘의 나는 내일이 와도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닿은 필통 아래 너와의 낙서 조각을 발견했다. 그 순간 너와의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선명하게 채웠다.


나의 시간은 충격이란 자리에서 벗어나, 가장 순수했던 과거의 파편들 속으로 역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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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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