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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월반하면 안되는 이유

손바닥에 잡힌 물집...멍키바에 숨은 의미

by 미스프리즐
지난 4월 봄소풍에서 딱정벌레 모양의 놀이기구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습니다. 다들 재미있게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각자 놀고 있는 중입니다.

"엄마, 난 멍키바(monkey bar-구름사다리)를 주로 해"


미국에 온 지 두 달쯤 됐을 때, 학교 쉬는 시간에 뭘 하느냐고 묻는 질문에 딸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멍키바는 우리나라의 구름사다리입니다. 원숭이처럼 철봉에 매달려서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가는 바로 그 놀이기구입니다. 딸이 멍키바를 한다고 답했을 때 그게 어떤 의미인지 그 때는 잘 몰랐습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미국에 딸은 2학년으로 입학했습니다. 미국은 8월에 새 학기가 시작하기 때문에, 6월생인 딸은 1학년으로 입학하기는 머리가 굵었습니다. 딸의 영어 실력이나 행실을 보면 아직 2학년이 되기에는 좀 부족해 보였지만 한편으로 한 학년 '월반'해준다고 하니 은근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깟 기분이 밥먹여주나


제 기분과 별개로, 딸은 "한국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미국에 온 지 3개월 차에는 "외롭다"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또래에 비해 키도 크고, 적극적인 아이가 친구 사귀기를 어려워한다는 게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딸은 어린이집, 학교, 학원 선생님들에게 모두 예쁨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아이가 어느날 "엄마, 나는 학교에서 점심도 혼자 먹고 멍키바만 해."라고 합니다. 시소도 타고, 그네도 타고 싶은데 같이 놀 친구가 없으니 정글짐을 철봉 삼아 혼자 놀았던 겁니다. 아이 목욕을 시키다가, 손에 잡힌 물집을 보고서 "요즘 운동장에서 신나게 노는구나"라고 말했는데, 아이는 맘 속으로 얼마나 속상했을까요.

전 세계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면 있는 멍키바(구름사다리). 주로 인기 없는 아이들이 혼자만의 도전을 하는 놀이기구다. 전학 온 친구들이 주로 멍키바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자기 학년에서 가장 어린 축에 드는 딸은 소위 '언니들' 사이에서 꽤나 치였던 모양입니다. 아이의 눈물을 보자 가슴 한 구석이 푹 꺼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이와 손잡고 걸어가는 길을 엄마 혼자서 마구 내달렸구나. 바쁘다는 건 핑계였습니다. 저 역시 영어가 익숙하지 않으니, 아이 학교에 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금발머리의 여자 선생님이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할까 봐, 제가 그 말을 못 알아들을까 봐 지레 겁을 먹었습니다.


아이의 눈물 앞에서 겁쟁이처럼 숨어있을 수만은 없지요. 그날로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으로부터 "앞으로 잘 살펴보겠다"라고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다음 날에는 학교에 가서 아이와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학부모가 자녀 학교에서 함께 점심을 먹을 수 있습니다. '누가 아이 학교에서 점심을 먹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오전 11시가 되니, 레깅스에 도시락 가방을 든 엄마가 서너 살쯤 돼 보이는 아기와 함께 학교로 들어왔습니다. '누구나 먹는 점심'인 것입니다.


지난 봄소풍 때는 샤프롱(자원봉사자)으로 참여했습니다. 평일 오전에 아이 소풍에 오는 엄마는 적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 역시 멋지게 빗나갔습니다. 한 반 학생이 20명인데, 봉사자가 8명이었습니다. 10명 중 4명, 그러니까 2명에 1명은 부모님이 자원봉사자로 소풍에 왔다는 뜻입니다. 첫 소풍인데,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스승의 날에 선생님에게 드리는 선물 외에 학교 전체에 과자나 음료 등을 기부(도네이션)하는 것도 웬만한 학부모는 모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글에서 자세히 소개를 하겠지만, 미국 초등학교에서는 아주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합니다. 동네 아이스크림 가게 하루 매출의 40%를 학교에 기부하는 행사에 참여한 사진.


학교 행사에 참여하면 할수록, 내가 얼마나 무관심한 엄마였는지가 보였습니다. 이제 학교 행사라는 행사는 모두 참석하고 있습니다. 학교 기부활동도 적은 금액이라도 빠지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9개월이 지났습니다. 얼마 전 딸에게 요즘도 멍키바를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요새는 주로 잡기 놀이(tag)를 한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멍키바는 손에 물집이 생겨서 아파서 이제 안 한다고 설명하더라고요.


얼마 전 한국에서 미국으로 온 지 두 달 정도 된 2학년 여자아이를 볼 일이 있었습니다. 우연찮게 그 아이의 손바닥을 봤는데, 물집이 잡혀 있었습니다. 멍키바를 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아 물론 이 친구는 학교에 전학 온 지 두 달 만에 생일파티 초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저희 딸보다는 빨리 친구를 사귀었으니 멍키바에서도 곧 탈출하겠군요. 하여튼 미국으로 전학 온 한국 어린이들 그리고 부모님들! 모두 응원합니다.


덧글.


소풍에 다녀온 후 딸과 대화를 나눠보니, 이 반의 역학 구도가 얼추 보였습니다. 아이 반 여자아이들은 '클라라'라는 백인아이와 '피비'라는 흑인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배경엔 엄마들이 있습니다. 클라라 엄마는 PTA(학부모 선생님 모임) 임원이고, 피비 엄마는 이 학교 5학년 선생님입니다. 전학생이 반에 잘 적응하려면, 두 아이의 그룹 중 하나에 들어가야 합니다.


저희 딸은 클라라 그룹에 들려고 했으나 실패한 모양이었습니다. 클라라 그룹에는 '안나'라는 일본인 여자아이가 있어서, 동양인 쿼터가 더 필요 없기 때문으로 보였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저희 딸은 '피비 그룹'에 정착했습니다. 얼마 전 열린 피비의 생일파티에 저희 딸은 초대됐지만, 클라라와 안나는 오지 않았죠. 미국의 초등학생 저학년에도 분명 사회는 분명 존재합니다.


사회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으려면, 어떤 면에서 앞서 나가야 합니다. 실제 예일대 연구를 보면, 자기 학년에서 나이가 많은 어린이들, 그러니까 생일이 일찍인 아이일수록 학교 생활에 적응을 잘하고, 자기 동생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그러니, 미국으로 전학을 온다면 한 학년 낮춰가는 것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월반한다고 좋을 거 하나 없더라고요.


<참고문헌>

Sibling Spillovers: Having an Academically Successful Older Sibling May Be More Important for Children in Disadvantaged Families

DOI: https://www.journals.uchicago.edu/doi/10.1086/724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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