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함께
가을이 익어가는 길목, 초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부산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우리가 졸업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는 각 학년별로 한 반씩 있었고, 우리 반은 6학년 당시 37명이었다.
이번에 만난 친구들은 그 졸업생 중에서도 우리 마을 옆 동네에 살던 친구들이다.
왜 이 친구들과 같은 동네로 묶여 이번 여행을 하게 되었는지 짧게 말하자면, 그 동네에 할머니가 계시는 큰아버지 댁이 있었고, 하교 후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곤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던 동네보다 그 옆 동네 아이들과 더 친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청년시절에도 이 친구들은 늘 변함없이 내 곁에 있었고 지금도 한결같이 지내고 있다.
옆 동네라고는 하지만, 나와 같은 성씨를 가지 씨족마을이라 친척인 경우도 있고 부모들끼리 서로 왕래하는 사이라 다 알고 지냈다.
나의 어머니는 생전에 그 시절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다. 누구 엄마는 배가 유난히 볼록했다든가, 누구 엄마는 아이를 낳을 때 너무 고생했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이다.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수십 년을 한결같이 지내온 참으로 소중한 벗들이다.
그 시절 옆 동네에는 나를 포함해 열 명쯤의 친구가 있었다.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친구도 있고, 연락이 끊기거나 사정상 이번 부산 여행에 참석하지 못한 친구들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형편에 맞게 가끔 만나지만, 그 만남은 언제나 유쾌하다.
젊은 시절보다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자주 만나면서 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만 들을 때마다 새롭고 즐겁다.
추억 속 이야기로 빠져들면 어느새 그 시절로 돌아가 헤어 나오기 힘들 정도다.
한 잔 술에 시름이 녹고, 익어가는 가을의 단풍잎 하나에도 추억이 고스란히 스며든다.
겨울이면 올무 놓고 토끼몰이하던 일, 얼음 위에서 썰매 타고 팽이 돌리던 일, 수박서리와 닭서리까지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그때 너희 집 감나무 홍시 많이 따먹었지?”
“우리 동네 뒷산 단풍이 참 예뻤어.”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황○○은 뭐 하고 지낼까?”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자녀 이야기, 부모님 이야기로 이어지며 밤이 깊어갔다.
다음날, 커피숍에서 예순이 넘은 친구들이 와글와글 떠드는 모습을 본 주인장이 물었다.
“어떤 사이세요?”
“마을 친구들이에요.”
“그럴 줄 알았어요.”
우리가 어린 시절 말투와 웃음소리로 이야기하니, 금세 알아챘던 모양이다.
이번 부산여행은, 내가 평소 트레킹을 자주 다니는 걸 부러워하던 친구들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부산 친구의 안내로 고 노무현 대통령의 봉하마을 생가를 방문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존경하던 대통령이었기에 묘역에서 묵념을 드리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또한, 6.25 전쟁 중 북한군과 중공군 등 17만 3천여 명의 포로가 수용되었다던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지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산 정상까지 2km 정도 되는데 모노레일을 타고 거제도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바다는 평온했다. 지쳐 있지도 않았다.
우리의 행복에 맞추어 잔잔히 꼬리만 흔들 뿐이었다. 우리는 그런 바다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고향의 산 너머로 지는 해를 떠올렸다.
그렇게 또 아련하게 이어지는 고향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웃었다.
어디를 가든지 고향과 지난 세월의 추억이 이어진다.
오랫동안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온 결과가 아닐까 싶다.
횟집에 들러 싱싱한 회에 한 잔 술을 곁들이며 또다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밤은 깊어갔고, 잠자는 시간조차 아까워 태종대 인근 찜질방으로 향했다.
둘째 날에는 이번 여행의 계기가 된 트레킹을 했다.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송정해수욕장까지, 느리게 느리게 왕복으로 걸었다. 이 구간은 ‘해파랑길’의 일부로, 나는 벌써 네 번째 걷는 길이었다.
걷기를 좋아하지 않거나 트레킹 대신 일반 관광을 하는 분들은 청사포 해변열차나 모노레일을 이용하여 여행하는 좋은 코스이기도 하다.
이 구간은 걷는 사람, 해변열차를 타는 사람, 외국인 여행객들로 붐볐다.
걷다가 바닷가로 내려가니 여행객들이 쌓은 돌탑이 많이 보였다.
아마도 각자의 안녕을 빌며 세운 것이리라.
우리도 돌을 쌓고 소원을 빌었다.
그때 한 외국인 여행자가 다가와 휴대폰 번역 앱을 내밀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라는 문구였다.
“소원을 빌고 있어요.”라고 말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지나갔다.
나도 해외여행 중 같은 행동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행의 묘미는 관찰에 있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색다른 도시를 둘러보는 것도 즐겁지만, 사람들을 관찰하는 재미 또한 크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의 뒷모습, 유모차 안의 아기, 유리잔도가 무서워 피하는 사람, 바다 저편으로 지나가는 배. 그 모든 것이 여행의 즐거움이었다.
지나가는 배 위로 석양이 비칠 때, 그 아름다움은 천국만큼 아름답지 않을까?
1박 2일 동안 피워낸 이야기꽃, 함께 나눈 맛있는 음식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다음엔 더 좋은 길을 찾아 함께 걷자.” 우리는 그렇게 약속했다.
친구들아, 남은 삶 더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