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고 에세이로 소통하며 시로 공감한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알프레드 까뮈의 이 말에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삶은 희망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얼마 전, 시인, 화가, 무용가, 음악가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함께 여는 <가을 시 낭송회>에 초대를 받아 서울로 가는 열차 안에서 생각해 보았다. 시를 통하여 내가 처음으로 세상과 만났던 때가 언제였던가.
어릴 적 중학 2학년 나이 때였다. 당시 너무 가난하여 또래아이들처럼 학교에 가지 못하고 부산의 어느 동사무소에서 사환으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검정고시 공부를 할 때였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수도 없는 외톨이에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냉소에 젖어 거의 자폐증에 가까울 정도로 마음의 문조차 꼭꼭 닫고 지내던 내 유일한 친구는 작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였다.
그 당시 낮엔 일하고 밤늦도록 공부하면서 나는 항상 <FM 음악방송>을 들었다. 그때 애청한 음악방송 중에 한국의 명시나 청취자들이 투고한 자작시를 낭독해 주던 프로가 있었는데, 그 프로에 내가 투고하여 방송을 타고 나온 시가 「불꽃」이란 제목의 시였다.
이 시 1연과 2연은 그때 음악방송 프로에 투고한 시 그대로다. 그러나 3연과 4연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열차 안에서 그때의 기억 속 이미지를 되살려 3연을 쓰고, 그때의 이미지와는 다른 현재의 새로운 이미지로 4연을 다시 써서 이어 붙인 시가 이 시 <불꽃>이다. 물론 초대받은 시낭송회에서 이 시를 낭송했다.
그런데 시낭송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야간열차 안에서 그때 쓴 시의 4연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내 가슴을 두드리는
이 공허한 웃음은
무엇인가
당시 가난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 있던 외톨이 자폐소년은 하늘 높이 솟구쳐 아름답게 명멸하는 불꽃을 바라보면서도 아이답지 않게 ‘공허한 웃음’을 짓고 있었구나. 문득 자기 연민의 감정에 빠져들면서 힘들었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그랬던 외톨이 소년이 스스로 자폐의 문을 열고 세상 속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시가 가진 또는 문학에 내재된 치유의 힘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늦게나마 어릴 적부터 꿈꾸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코로나>라는 길고 어두운 터널은 끝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발발하여 전쟁당사국은 물론 전 세계인이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의 끈은 놓지 말자. ‘희망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죄악이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이 하는 말이다.
그렇다.
삶이란 절망 속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고
희망을 찾아가는 장대한 여정이다.
지금 이 순간이 비록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그대, 당신의 삶은 한 송이 불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