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젠틀P Apr 12. 2023

나는 ENTJ-A 이다.

당신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아시나요?




나에게는 아주 안 좋은 버릇?이라고 해야 하나?

꽤 오랫동안 나와 맞지 않은 태도를 입고 지내왔다. 


어려서부터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무언가를 대표할 만한 자리를 불편해했다. 


발표가 무서웠고 선생님께 이름이 불려

자리에 일어서기라도 하면 

친구들이 바라보는 시선에서 낯뜨거움을 느꼈으며 

심장이 쿵쿵거려 목소리는 

모기처럼 작아졌고 숨은 가빠르게 떨렸다.

만원 버스에서 도착역에 다 달아 못 내리는 경우에도

"잠깐만요! 아직 못 내렸어요."를 못해

그다음 정거장에서 조용히 내려 걸어오는 

소심한 아이였다. 


항상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녔고 나서기 싫어

그냥 조용히 묻혀 지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ENTJ인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나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고 불편하게 살아왔을까?'






하지만, 시선이 집중되지 않는 자리와 환경에서는

내 주위엔 항상 친구들이 모여 북적북적했고

그저 나와 이야기하고 놀며 그렇게 

날 좋아해 주고 따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매번 앞에 나서 뭐라도 할라치면

그렇게 한 없이 작아지고 자신감도 잃었다.

그런 유년시절과 기초교육을 받을 때까지 

난 그저 내향적이고 소심하며 나서길 극도로

불편해하는 IXXX 의 삶으로 살아온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나는 어린 시절을 그렇게 지내왔을까?'



   



 

이윽고 성인이 되어 군에 입대했고, 

남중, 남고에 이어 군대라는 커뮤니티는 

나에게 어색하지 않은 시스템이었고 환경이었다. 


나는 동성인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사람이란 걸


'그때 깨달았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나이와 성격의 사람들은

생김새는 물론하고 말투, 행동, 태도 등등

한 지역에서 20년 넘게 살아온 나에게는 

정말 새로운 자극이자 경험이었고 신선한 재미였다.   


하루하루의 군사훈련 도중 잠깐잠깐 쉬는 시간에는

매번 많은 동기들이 내 주위에 몰려들었고

나는 뭐가 그리 할 이야기가 많은지 

항상 뭐라 뭐라 떠들었나 보다. 


'나는 말이 정말 많았다.

그런데 재미있게 많았던 것이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

무슨 연유인지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교수님께 뭔가 불편한 이야기를 듣는 자리였다. 


내 앞에 서 있던 여자 교수님은 나보다는 좀

작은 키였고 단호한 어투로 나에게 이야기를 

하시는 모양새였다. 


난 그때까지 살아온 방식으로 나무람이나

꾸짖음을 받을 때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반성을 하는 의미의 태도로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을 바라보는 상태를 유지했었고,


교수님은 대뜸!! 

"젠틀아!! 넌 날 무시하는 거니?

왜 내가 이야기하는데 눈을 안 바라보고

바닥을 쳐다보고 있는 거야?

내 얘기가 듣기 싫구나!" 


'아, 여기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눈을 마주치고 얘기해야 상대방에 대한 예의구나.'


그때부터 내 태도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고 나를 소개하고

손을 내밀었다. 내가 속한 어떤 

바운더리나 커뮤니티에 문제가 생기면

먼저 나서서 해결책을 제안했고 

역할을 나누어 주었으며 사람들은 곧잘

내 의견에 따라 주었다. 

불편하거나 귀찮은 일이 발생하면

주저 없이 일어나 그 일들을 처리했고 

바라는 것이나 의도 없이 그저 


'내 결대로 행동을 했다' 

그런데 마음이 너무 편한 느낌이었다.


어려움에 처한 친구들은 나를 가장 먼저

찾아 조언을 구했고 나는 진심을 다해 위로 또는,

해결책을 같이 찾아 주었다. 

가끔 어떤 친구들은 정말 무거운 비밀 같은걸 나에게

털어놓을 때도 있는데, 

이게 참 웃긴 사실이 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비밀을 지니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것이면 철저히 숨기지만

남의 비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떻게라도 그것을 다른 곳에다 풀어놓아야 

자기가 가진 비밀의 짐을 덜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알게 된 수많은 비밀은

나에게 흘러 들어왔고 

난 그저 잠시 저장만 시켰다 지웠지 그걸 

다른데로 흘러가게 만들진 않았다. 


'난 정말 말이 많다.

그렇지만 입이 싸진 않다.'








그렇게 9년간의 외국생활은 

나를 온전한 나로 돌아오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나는 왜 나와 반대되는 삶을 살아왔고

뭐가 문제였는지 과거를 따라 올라가며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는 그 해답을 찾았다. 


어린 시절 아팠던 기억이 있다.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다.' 


우리 집은 정말 잘 살았다. 이렇게 표현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매우 부유했다. 

40년 전 앞정원과 뒷정원이 딸린 2층 양옥집에

지하에는 봉제공장이 있었다. 

정원에는 사과나무, 대추나무들이 자랐고

철에 따라 작은 나무에 올라 과실들을 따서

친구들에게도 나누어주고, 

할아버지께서는 외국을 돌아다니시며 일을 하시다

사 오신 갖가지 신기한 장난감들은

어린 나에게도 감흥은 크게 없었기에 

그런 것 마저도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들, 삼촌들, 결혼을 한

고모의 식구들까지 15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집에 살았고 나는 그 집의 장손이다.

 

집의 정원과 마당, 옥상 할 것 없이 그 큰집을

놀이터 삼아 지내왔고  

하루는 삼촌방, 하루는 고모방, 하루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잠을 자며 부족한 것이 

없다기보다 부족하다는 

느낌조차 뭔지도 모르고 자라왔다.


그러던 중 집이 크게 휘청거릴 사건이 찾아왔고

그 많은 대가족을 이루며 살던 우리는 

뿔뿔이 찢어지게 되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우리 네 가족은 

단칸방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이사를 나왔고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로서는 

정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매번 하교시간에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 곳으로 빙빙 돌아 집에 왔고

친구들이 알아볼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남들이 나를 알아볼까 무서웠다, '



 


  

  

아,,,, 내가 그런 아픔이 있어서 유년시절을 

그렇게 지냈던 거구나.... 


어렸던 나 자신을 불러와 꼭 안아주고 

이런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말 힘들었겠구나... 이제 괜찮아.

이제라도 내가 너의 마음을 알았으니 

지금부터라도 너답게 살아. 잘할 수 있을 거야.'




  








나에게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엄마에게 가장 많이

들은 세 개의 주옥같은 말씀이 있다.   


"가지가지한다." (화내시면서)

"입만 살아가지고!" (화내시면서)

"웃기고 자빠졌네" (화내시면서)


그렇다. 


'나는 정말 못하는 것 없이 재주가 많다.'

'나는 진짜 이야기꾼이고 그 이야기를 조리 있게 잘한다.'

'나는 매우 재미있는 사람이다.'  


'나는 ENTJ-A이다.' 

  





 




 




작가의 이전글 갑자기 꺼졌던 라디오가 켜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