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의 시간 = 공공재?
"너무 아까워서..." 그녀의 그 말이 고마웠다.
나를 아까워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뭉클한 일이다.
때문에 이른 아침, 엑셀 창을 열고
나의 하루를, 나의 시간을 한 시간 단위로 쪼개 보았다.
오전 5시 기상.
위풍당당 타이핑했으나, 몇 초 후 5를 6으로 고쳤다.
'알람 맞추고 일어나면 되지 않을까?!' 6을 다시 5로.
'아니 아니. 체력이 예전만 못해. 장기 프로젝트잖아.'
5를 6으로 다시 바꿨다.
6에서 시작해 22에서 끝나는 하루.
총 16칸을 만들어 놓은 후
꼭 해야 하는 '주부로서의 일'을 칸칸 채워 넣고 하늘색을 칠했다.
세상에 주부의 일은 하늘이 내린 일이라는 거야 뭐야.
22칸의 대부분이 하늘색이로구나~
시간을 다시 30분 단위로 쪼개 볼까? 고민했지만 포기.
틈새시장(? 자투리 시간을 모아 모아 보겠다는 의도였음)을 노리겠다며
약 한 달간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분석하고 기록했던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다.
'주부의 시간은 공공재임.'
틈새시장 프로젝트(?)에 대한 나의 결론.
'나는야 배짱이 주부!' 작정하고 나서면 할 일이 정말 없지만
제.대.로. 한번 해 볼까? 나서면 끝없이 일, 일, 일이 몰려드는 것이 집안일인 듯.
"우와~ 파김치 담았어?" "와우, 간장게장까지!"
이렇게 티 나는 일은 보람이라도 있지.
마당 낙엽 긁어 모아 버리기, 욕실 타일 물때 제거,
그릇장 정리, 냉장고 청소, 분리수거, 음식물쓰레기 처리 등등은
시간과 에너지 대비 티도 나지 않는 일이다. (사실 주부의 일 대부분이 이러함.)
죄 하늘색인 엑셀 시트에서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며 확보한 노란색 4칸.
'하루 4시간, 가능할까? 에잇, 3시간으로 줄일까? 아냐 아냐. 3시간은 너무 적잖아.'
[평일 9시~13시까지 업무 가능. 실시간 응대 및 피드백 가능.]
비고란에는 혹시 발생할지 모를 예외상황도 꼼꼼하게 기입했다.
파일을 송부하며 다음과 같은 감사인사를 더했다.
"좋은 제안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의 하루를 시간대 별로 나누고 운용 가능한 시간들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
견적서 송부 후, 살짝 설레고 동시에 울적한(왜 온전한 나의 시간은 하루 4시간도 빠듯한가!) 마음으로 전복죽을 끓였다. 든든하게 한 그릇 뚝딱! 하고 출근하는 남편에게 제안받은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했다. 주 1회 이상 출근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말도 전했다.
"늘 이야기 하지만, 나는 당신 일하는 거 적극 찬성이야. 나가서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그러면 좋지."
말자, 말자, 말자.
말하지 말자, 암말도 하지 말자.
하지만 내 입은 결국 열리고야 말았으니...
"당신 마음 진심인 거 알아요. 나 일하는 거 누구보다 응원하고 지지하는 것도.
그런데, 비아냥 거리고 싶지 않은데 마음이 쫌 그래.
막상 일 시작해도 여전히 집안일이란 도미노는 내게만 치우쳐 있을 거잖아.
자기가 그 도미노 조각들을 일부 가져갈 것도 아니고"
더 있다간 작은 불씨가 화산이 될 것임을 감지한 것인지
남편은 서둘러 주차장으로 나서며 손가락 하트를 날렸다.
'아놔! 하트 따위를 날릴 일이 아니라고, 이건!'
내가 원하는 건
"걱정 마 선영아. 집안일 팍팍 가져가겠어."
"청소 따위? 걱정 말어. 빨래? 정확하게 반반 나눠보자."
뭐 저런 말, 약속이었다고. 손가락 하트 따위, 나는 천 개도 날려줄 수 있다고!
거실 창으로 스며든 얄밉게 따사로운 햇살을 보며
식어버린 전복죽을 입 한가득 밀어 넣었다.
'어떻게든 할 거야. 잘 먹고 힘내서 하고 말 거야!'
+
이 계약, 성사되면 좋겠다.
그러면 제일 먼저 적금통장 만들어야지.
따박따박 정기적인 수입이 있다는 건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던가.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다~~~
매월 찾아오는 월급의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