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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Oct 27. 2022

행여 잊을까, 기록

아이의 말말말


01

"아... 4시간을 들여서

우리는 아빠를 1시간도 채 못 보는구나."


(아빠의 생일 케이크를 굽고, 테이블을 세팅하고, 아빠가 오나 안 오나 문 앞에서 초조하게 대기하다 결정적인 순간 초에 불을 붙이며 준비했음에도... 밤늦게 귀가해 피곤한 아빠가 촛불만 불고 자러 간다고 하니 하는 말. 

결국 아이의 저 말에 남편은 함박웃음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음. 

내가 붙잡을 땐 "오늘 진짜 피곤하거든" 하더니만. 흥칫뿡. )



02

"엄마, 그럼 나도 (책이 나오면) 저작권료를 줄 거야?"


(작가인 아록 이모가 엄마가 그간 쓴 글들을 다 모아 책으로 엮을 방법을 고민해 보라 해서, 여기저기 흩어진 글들을 모아 보는 중인데... 재밌는 내용은 다 엄마 창작이 아니라 "네(아이)가 한 말들. 즉 너의 창작이었다"는 말에 저리 질문함. 
당황해서 얼결에 저작권료 4%로 주기로.)


"엄마, 엄마가 유명해져서 책이 많이 팔리면 퍼센트를 다시 조정해 줄 거지?" 


(얘는 진짜 누굴 닮은 걸까? 어린 시절 끼고 살던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의 영향일까?)


03


"문구 페어도 데려가 주고, 카페쇼도 가니까... 

나도 한 번쯤 엄마가 좋아하는 걸 해 줘야지."


(서울 아트북페어에 데려가려고 감언이설로 꼬시는 내게 "딱히 흥미는 없지만..."이라며 건넨 말.)


'네가 엄마의 노고를 헤아리긴 헤아리는구나' 순간 울컥. 

하지만 기회는 이때다 싶어 나도 이렇게 답함.


"그러면... 북페어는 엄마 혼자 갈 테니까... 

다음 주에 전시 2개... 아 두 전시 모두 같은 동네야. 전시 2개만 같이 가 줄래?"


+
마주이야기 : 대화를 뜻하는 순우리말.

어느 날 일을 그만두고 24시간 아이와 단짝 아닌 단짝이 되어 지내야 했던 시절. 세상이 나를 버린 것 같았다.

오전 9시부터 지겹도록 울려대던 휴대폰이 멈췄고, 가끔 오는 전화라곤 남편, 친정 부모님 아니면 택배 기사님과 광고 전화가 전부였다.

'이러다 나는 화석이 될 거야. 이러고 있다간 절대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덜컥 겁이 났을 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이야기'라는 주제의 책을 발견했다.

아이가 잠들면 밀린 빨래, 설거지, 청소 대신 핸드폰을 붙잡고 아이의 말을 기록했다. 내가 해 왔던 일 -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과 그나마 미약하게나마 연관 있는 일이 당시의 내 겐 그것뿐이었다.

'이 딴 거 한다고... 뭐가 달라져...' 싶었던 적도 많았는데
아록의 말이 파도가 되어 내 등을 밀었고, 그래서 여기저기 끄적거린 기록들을 모으다 보니,  갑자기 그 시절 무엇이나 쓰던 내가 대견 해 졌다.

붙잡아 텍스트로 박제해 두지 않았으면 뽀르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을 순간들이 여섯 살, 일곱 살, 여덟 살, 아홉 살... 그 나이의 아이의 말로, 생각으로 잘 기록되어 있더라.

그래서 오늘도 

대파(빨리 다듬어 냉장보관해야 함), 설거지, 청소, 빨래, 분리수거를 다 내팽개치고 일단 기록.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다운 일(?)이었고, 그렇게라도 나의 '업'과 연관된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듯.
그 시절의 끄적임이 모아놓으니 내겐 위로이자 응원이고, 뿌듯함 이더라. 그래서 오늘도 깜박하면 휘리릭 날아가 버리는 아이의 말을 꼭꼭 붙들어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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