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ny May 24. 2022

내가 가장 예뻤을 때

환이처럼, 해금이 처럼 누군가를 위해 울어줄 수 있다면

01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가장 예뻤을 시기에 가장 치열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그들이 살아낸 시절이 안쓰럽고 미안했다. 최소한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뉘앙스만이라도 보여주지. 작가가 야속했다.


'봄밤이 이제 막 열리고 있었다'라는 엔딩만으로 그들의 평안과 안녕을 예측하기에는 그들이 견뎌낸 시절이 너무나 차갑고 가혹했다.



02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공선옥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일본의 전후세대 여성 시인이라는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에서 제목을 따 왔단다.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아마도 광주 민주화 운동의 전후인 듯한데, 그 무거운 이야기를 비교적 덤덤하게 공선옥 작가 특유의 구수한 사투리와 향토적 색채 강한 표현들로 풀어낸다.


03

공선옥 작가를 좋아한다. 사실 좋아한다라고 말하기엔 영 염치없는 것이 나는 작가의 작품을 손에 꼽을 정도만 읽었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행복한 만찬'. 친구에게 그 책을 선물하려다 절판된 것을 알고는 좌절했을 만큼 좋아하는 책이다.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하나.

대단하지 않고 거창하지 않아 이제는 기억 속에서 잊히는 소중한 음식들을 그녀 만큼 맛깔스럽게 생생하게 글로 풀어낼 작가가 또 있을까 싶어서다.


04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오늘 밤 이 책 때문에 나는 잠이 달아나 버렸다. 해금이. 승희. 정신이. 태용이. 승규... 등등... 책 속의 그들. 언니 같고, 동생 같고, 오빠 같고, 아부지 같은 그들 때문에 나는 마음이 짠 하고 찡하고 그렇다. 왠지 나만 안녕하고 평온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고 서글픈 밤이다.


05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숱하게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너무나 불행했고

나는 너무나 안절부절

나는 더없이 외로웠다


- 이바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중에서


06

"환이 어렸을 때 일이었대"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동네 골목을 지나는데 어떤 아이가 울고 있더래. 그냥 갈 수가 없어서 이름을 물었더니 애가 머루, 그러더래. 집이 어디야, 그랬더니 칭아, 그러고. 그럼 머루야, 여기서 울지 말고 집에 가라, 그러고는 가던 길을 가려는데 머루가 옷소매를 붙잡더라네. 머루야, 형은 형 집에 갈 테니까 머루도 울지 말고 머루 집에 가라, 아무리 달래도 머루가 놓아주질 않더래.

환이 가려고만 하면 더 큰 소리로 울어서 할 수 없이 애를 파출소로 데리고 갔대. 그러고 돌아오려는데 머루가 또 울어서 거짓말을 했다네. '머루야, 형이 맛있는 사탕 사 갖고 올게.' 그러고는 파출소를 뛰어나왔는데, 그 뒤로 파출소 앞만 가면 머루가 생각나서 눈물이 난대. 그래서 일부러 파출소를 피해 다니기도 했다네.

환이 그런 애야. 그렇게 마음이 여려."


"머루, 칭아...."

겨우 참았던 눈물이 다시 퐁퐁 샘솟기 시작했다. 시인이 말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 때문에 울 수 있는 사람은 아름답지. 자신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보다 다른 사람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질 거야. 그러니까 너도 아름답구나. 환이 때문에, 해금이 너 때문에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졌는지도 몰라. 봐, 네가 울기 전보다 지금 별이 훨씬 더 반짝이잖아."


- 소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p212

매거진의 이전글 살아남은 자의 응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