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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May 27. 2022

러브레터 쓰는 일을 하고 있어요

나의 일에 대한 한 줄 정의

01

<회사를 만들어 가는 중입니다> 지인들에게 이야기한 후 나는 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달한 결론은 "아!!!!!!!!!!!" 안타까운 깨달음과 후회.


뷔페를 좋아하지 않는 나인데, 정신 차리고 살펴보니 스스로가 뷔페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지 수만 많지 딱히 끌리는 음식이 없는 그런 뷔페 말이다. 나란 사람은 콘텐츠를 기반으로 A부터 Z까지 못 하는 것 빼곤 대부분의 일을 평균 이상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데 뾰족한 한 가지가 보이지 않았다. (사업자등록증을 내지 못한 결정적 이유!)


나의 시그니처 메뉴는 뭘까? 자주 생각했다. 특히 유명하다는 음식점에 가면 '뭘까? 뭐지? 나의 시그니처 메뉴?' 스스로를 추궁했다.


02

<러브레터를 쓰던 그 마음으로>라는 말로 시작되는, 제안서인 듯 제안서 아닌 것 같은 문서를 작성했다.

다음장엔, 그냥 마음 잘 통하는 친구인 줄 알았던 단짝과 다름없었던 남자사람친구에게 연인이 생기고서야 아!!!!!!!!!! 후회를 백만 번쯤 한 이야기를 썼고, 그 다음장엔 이렇게 썼다.


"사랑은 놓쳤지만 일은!"


쓰면서도 스스로 '이거 진짜 이상하겠지?' 수십 번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나다. 내가 잘하는 건 러브레터 대신 쓰기이고, 그 마음을 문서에 담고 싶었다.


03

나의 구멍은 미약한 브랜딩에 대한 학문적 지식. 그래서 자꾸 책을 사고 꾸준히 공부하고자 계획을 세우지만 늘 밀린다. "엄마 엄마" 부르는 은쮸 목소리에, "제발 제발" 아우성인 빨래와 설거지에.


절박한 마음으로 가장 쉬운 일, 세상 금방 하고 매일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할 수밖에. 그건 바로 소비자 박선영 관찰하기. 만만찮게 까탈스러운 나를 설득시키는 것들을 수집하고 탐구한다. 


잘 팔고, 잘 팔리는 글을 쓰고 싶다. 좋은 마음으로 정성을 다한 제품들이, 얼마나 마음 쏟았는지 읽히는 기획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서 닿아 잘 팔리면 좋겠다.


그래서 의뢰받은 작업을 할 때면 책이건, 인터뷰 건, 제품 소개글이건 어떻게 꼬실까(?)를 고민한다.


04

이번에 또 한 번 깨달은 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구나.

러브레터를 쓰는 마음으로 문서를 작성하면서는 '이 문서가 통할까?'가 관건이었다. 작성 완료 후 문서를 송부하고 나니 내가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정리가 되었다.


05

내가 하는 일은 러브레터를 써 주는 일이었더라.


자기소개서를 쓰는 사람에겐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 자신을 제대로 꼬셔봅시다'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일을 하게 될 때면 진짜 신이 나서 그것에 무관심한 내 친구들을 꼬시는 마음이 된다.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가끔 친구들 대신 연애편지 써 주곤 했는데. 아하! 신의 큰 그림이었어! 혼자 흐뭇.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나는 왜 A부터 Z까지 못 하는 것 빼고 다 평균 이상 하는 가짓수만 많고 손 갈 곳 없는 뷔페 같은 사람이 되었을까? 잠 안 오던 날들이 많았다.


이제 나는 나를 이렇게 한 줄로 정의해야지.

박선영은 러브레터를 대신 써 주는 사람입니다.


+

러브는 언제건 좋다.

사랑은 언제나 들뜬다.

그래서 나는

러브레터를 잘 쓰려고 머리 굴리는

내가 좋다.


이어지는 사진은 5월 29일까지 피크닉에서 진행되는 사울 레이터 사진전에서 촬영한 장면들.

(무소음에 플래시 미사용시 사진 촬영이 가능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단어 러브레터로 나의 일이 정의되면서, 이상하게 얼마 전 다녀온 사울 레이터 전시가 떠올랐다. 다음의 사진들은 전시장 마지막 공간에서 상영되는 사울 레이터의 인터뷰 영상 중 일부이다. 행복에 대한 성공에 대한 그리고 사랑에 대한 그의 답변에 가슴이 먹먹해,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같은 영상을 보고 또 봤다. 

솜스와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나요?
우리는 앉아서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어요
나는 이 방에 앉아서 그런 솜스를 바라보곤 했어요
남들이 별 관심 없을 때에도
내 사진들이 훌륭하다고 믿어줬죠
나는 책 모으는 걸 좋아하고
그림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내가 아끼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을
갖는 것을 가장 큰 행복이라고 생각했죠
성공하는 것보다


성공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것보다는
내가 아끼는 사람이 있고
날 아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을 선택할 거예요.


화가이자 모델이었다고 알려진 솜스 밴트리는 사울 레이터와 작가와 모델로서 처음 만나, 60년대부터 함께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시장 한 켠에 있던 솜스에 대한 설명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그(사울 레이터)는 그녀가 모델로서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광고에 기용했으며, 그녀는 그가 큰 주목을 받지 못할 때부터 그의 예술성을 열렬히 지지했다. 밴트리는 2002년 사망했으며, 이후 레이터는 본인의 뒤늦은 성공을 그녀와 함께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아주 늦게야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사울 레이터는 아흔 번째 생일을 일주일 앞둔 2013년 11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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