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ny Sep 22. 2022

세탁기 때목욕 하는 날

마음이 길을 잃어 청소를 합니다

#드럼세탁기

#분리청소    

 

01

바꿀까 말까, 한참 고민하다

분리 청소 서비스를 신청했다.

     

“2008년 제품이네요?” 확인한 기사님은

태블릿을 건네며 “잘 읽어보고 서명해 주세요.” 하셨다.     


7년 이상 된 세탁기는 서명을 해야만 분리 청소를 진행해 준단다.

확인 요청한 내용은 대강 이렇다.     


‘기계의 노후로 인해, 분리 청소를 진행하고 재결합 후 작동 시

소음이 발생하거나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뭐라 뭐라 뭐라....'    


100일도 안 된 아이의 수면마취 동의서에 서명을 요청받았던 순간이 생각났다.

건조한 담당 의사의 설명에 "최악의 상황은 뭔가요?"라고 물었었지.


“재겹합시 문제가 생기는 비율이 높은 편인가요?”

“뭐... 생길 수도 있고 안 생길 수도 있죠.”     


“저... 분리 청소 비용이 얼마였죠?”  


02

세탁기 분리 소음이 온 집안 가득인데,

나는 거실에 앉아 ‘만약 세탁기가 운명한다면’ 걱정을 사서 하기 시작했다.     

젠가를 하듯, 통장의 잔고를 머리에 떠올리며

한정된 숫자들툭툭 나눠 이리저리 옮기기 시작했다.     

 

클래식 기타 구입으로 할당된 숫자를 지웠다.

좋은 악기는 비싸고, 비싼 악기는 소리가 좋다.

30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만큼 내 기준에서 꽤 큰 숫자였으나... 세탁기 비용으로는 부족.     


또 뭘 지울까? 건강검진? 필라테스?

1년 동안 기다렸던 정원수 식재비?


앞집과의 경계에 있던 정원수가 재작년 여름 전멸했다.

담장을 대신하던 정원수라 사라지고 나니 담장이 없는 상태나 다름없는.

비용 때문에 망설이고, 또 죽일까 걱정하다 보니 식재할 시기를 놓쳤다.

담장이 없다는 건 꽤 불편하다. 그래서 벼르고 별렀는데...


지웠다가 살리고, 살렸다가 지우고.

숫자들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결국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03

“분리 다 끝났습니다. 와서 상태 확인하세요.”     

“이 정도면 굉장히 양호한 편이네요. 고무패킹도 세척만 하고 그대로 사용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한결 상태가 좋았던 세탁조 모습에

나는 지웠던 숫자들을 다시 살렸다. 까닭 없이 부자가 된 기분.


이렇게 청소를 하며 또 하루가 지나간다.


+    

제주에서 돌아온 후 한동안 밀린 일들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바쁨의 날들이 일단락되자 이번엔 ‘나는 자라서 무엇이 될까?’라는 고민과 걱정이 밀려들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어떤 파이팅도 시큰둥했다.

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파이팅도 안 했다.      


며칠 전부터 하루에 한 곳씩 집을 정리 중.


냉장고-냉동실-주방 선반-팬트리를 거쳐 오늘은 계단실.


열 맞춰 있는 물건들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해 날 때 빨래 널고 해 질 때 바삭하게 마른빨래는 걷을 때면 하루를 보람차게 보낸 것 같아 뿌듯하다.

    

당분간은 이렇게 집안 구석구석을 열 맞추고 광내며 보내야지.

이러다 보면 눈 닿는 곳, 손 가는 곳은 착착 정리정돈되어 있겠지. 알게 뭐야. 이렇게 청소의 날, 정리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 날 어느 순간 어수선한 마음도 제 갈길 찾아갈지.

    

세탁기 조립하는 기계소리가 요란하다.

14년 만에 때목욕 제대로 했을 세탁기를 기대하며 괜히 설렌다.


매거진의 이전글 친구에게 알려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