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ny Sep 27. 2022

당신의 첫 마음은 얼마인가요?

서툰 손길이 익숙해지기 까지, 클래식 기타 레슨기

01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들이 이어졌다. 

밥도 먹기 싫고, 누군가를 만나기도 싫었다. 책도 싫고 음악도 귀찮고, 그냥 다다다 무료하고 나른하고 성가셨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짜증이 났다. 특히 당연한 듯 내 몫으로 돌아오는 집안일엔 더더욱.

- 밤새 바삭하게 마른 식기들을 각자의 자리로 돌려보내는 일도 

- 개수대 음식물 찌꺼기를 긁어모아 음식물 봉투에 담는 일도

- 쓰레기 수거차 시간에 맞춰 재활용 쓰레기를 문 앞에 내놓는 일도

- 쌓여가는 세탁물을 해결하는 일도

- 냉장고 앞에 서서 '오늘은 뭐 먹지?' 고민하는 일도

다다다 싫었다. 까닭 없이 화가 났다. 

왜? 내가? 

왜? 나만?


간신히 삼시 세 끼만 해결하며, 넷플릭스와 웨이브와 티빙을 오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더는 안 되겠다 싶었던 나는 고민상담을 했다.


"딸... 고민이 있어."

"사실 엄마가 너한테 "공부 좀 해" "왜 놀기만 하니" 이런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엄마가 그러고 있으니 어떤 말도 할 수가 없거든.

어떻게 하면 엄마가 다시 일상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음... 그러니까 엄마, 일이 하기 싫다는 거지?"

"아니. 그게 아니라... 도무지 의욕이 안 생긴다니까. 하기 싫은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거라고."

"음... 엄마, 그냥 완벽하게 놀아보면 어때? 일 조금 하고 놀고 그런 거 말고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놀기만 하는 거야."


(그럼, 네 밥은 어쩌고? 빨래는 누가 하니? 분리수거가 차고 넘칠걸!)


02

그런 와중에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평생교육원의 수강생 모집 공지였다.

인기 있는 강좌들은 진작에 마감되었고 수강 가능한 강좌 중 클래식 기타가 있었다.

클.래.식.기타.


초등학교 5학년. 친구들 따라 바이올린을 배우겠다는 내게 엄마는 클래식 기타 레슨을 받게 했다.

"기타 싫어. 나도 바이올린 하고 싶다고!"

고집부리는 내게, 엄마는 바이올린과 기타가 닮았다고 이야기하며 크기가 큰 기타가 훨씬 더 좋은 거라고 꼬셨다. 열한 살. 큰 것이 좋은 것이란 말에 속아 넘어 갈리 없는 나이.


바이올린은 절대로 시켜줄 것 같지 않았던 나는 어쩔 수 없이 클래식 기타를 배우러 다녔다. 작고 앙증맞고 고급스러운 바이올린 가방이 갖고 싶었다. 바이올린 활을 칼싸움하듯 휘두르다 선생님께 혼이 나는 모습조차 부러웠다.


크고 무겁고 활도 없는 기타 따위 흥칫뿡이었다. 그럼에도 약 2년을 배웠다. 


특이하게도 엄마는 기타 연주와 공부를 동일하게 여겼다. 시험기간일지라도 기타를 연주할 때면 "공부 안 하니?"라는 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때문에 나는 공부가 하기 싫은 날이면 기타를 손에 들었다. 


03

하지만 첫 수업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오락가락. 무엇보다 기타를 새로 장만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스파인 코렉터/ 짐볼/ 하프 짐볼/ 폼롤러/ 트위스트런

오카리나/ 퉁소/ 바이올린/ 피페


꾸준한 운동으로 건강한 몸을 만들겠다며, 야심 차게 구입 창고행이 된 물건들이 눈앞에 줄을 섰다.

음악 연주로 마음의 평온을 얻겠다며 야금야금 사고 배운 악기들이 떠올랐다.


클래식 기타는 몸집이 크지. 쓸만한 악기(?)는 기십만원은 할 테고.

당근에 키워드 알림을 맞춰두곤 '클래식 기타' 판매 알림이 뜰 때마다 들여다봤다.

어차피 연습용인데 아무거나(=저렴한 악기) 사고 말까 고민했다.


결국 나는 2년간 방치한 바이올린 점검을 하러 갔던 악기점에서 클래식 기타를 구입했다. 바이올린 구입 시 이미 좋은 악기 = 비싸고, 비싼 악기 = 연주자의 기를 살려줌(소리가 좋아, 짐짓 연주를 잘하는 듯 착각하게 함)을 경험한 나는 "너무 고가는 아니지만, 쓸. 만. 한. 기타를 추천해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예정에도 없던 고가(? 내 기준에선)의 기타를 구입하곤, 큰 비용을 치른 첫. 마. 음. 때문에라도 결국 나는 기타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으리란 말도 안 되는 확신을 가졌다. 


+


퇴근 후 덩치 큰 기타를 발견한 남편이 내게 물었다.

"어머님 댁에서 가져왔어?" (친정에 있는 중학생 시절 쓰던 내 기타를 의미.)

"아니."

"그럼?"

"샀어. 오늘 바이올린 점검하러 갔다가."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안다. 저 침묵, 저 눈빛이 무얼 의미하는지.

'여보. 제발. 제발 다음 질문은 하지 말아요. 알아. 나라도 그걸 묻고 싶을 거야. 하지만 부디 제발 그러지 말지. 이건 내 첫 마음이라고. 그러니...'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남편은 기어이 내게 묻고 말았다.

"그래서 얼마 줬는데?"


반으로 깎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내가 왜? 뭐 때문에!'라는 생각과 함께 힘차게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 보였다.


"오.. 만... 뭐? 오십만 원?!!!!"


그날 이후 남편과 나는 3일째 서걱거리는 중이다. 남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마음으로는 서운하고 섭섭하다. 


남편이 너무나 사고 싶었다며 판화작품을 (내 기준에선 너무 고가였음) 덜컥 구입해 가져왔을 때, 나 역시 "얼마예요?"라고 가격부터 물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봤다. 아쉽게도 기억이 나지 않네. 


나이가 들 수록 깨닫는다. 대부분의 첫 마음에는 비용이 든다. 중학교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미시솔레라미' 개방음 연습을 하며 결심했다. 이 서툰 손길이 익숙해지는 날 남편에게 말해 주어야지. 나의 첫 마음에 왜 50만 원이란 비용이 필요했었는지. 그리고... 기억해야지.


"얼마 줬어?"라고 다그치기 전에, 나 또한 상대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기로.


매거진의 이전글 세탁기 때목욕 하는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