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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Oct 21. 2022

분주한 아침엔 ㅇㅁ생각

다리고. 끓이고. 데우고. 닦고. 털고. 담고.

01

"잘 다녀와요. 운전 조심하고."

남편의 차가 출발하자 그제야 휴우. 

다리고, 끓이고, 데웠다. 닦고, 털고, 담았다.

아침의 80분은 그렇게 휘리릭.


02

"엄마, 내일 아침에도 그거 해 줄 수 있어?"

어젯밤 아이가 부탁한 메뉴는 들기름 막국수.

시계를 본다. 


현재 시각 6시 42분. 아이의 기상시간 7시 20분.

7시 15분에 물을 끓이면 되겠군.

야호! 지금부터 쉬는 시간이다.


03

오늘은 남편에게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이다.

분명 신경 쓰고 있으면서 남편은 그저 괜찮단다.


"와이셔츠... 다려야 하지 않을까?" 

"괜찮아. 재킷 입을 거잖아."

"넥타이도 좀 쭈글 한데."

"괜찮아. 매면 안 보여."


"신발은..." "이젤은..." "아침밥은..."

물어봐야 그저 괜찮다고 할 것이 분명해

덩달아 나도 그러려니 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04

새벽 5시 30분. 눈이 번쩍.

살금살금 거실로 다리미판을 옮겨와 

와이셔츠를 다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별별 수업도 많더구먼, 10분 완성 와이셔츠 완벽 다리기. 이런 수업은 왜 없는 거야.'

와이셔츠 한 장을 30분 넘게 낑낑 대며 꿍얼꿍얼.


그 와중에 텅 빈 밥솥이 떠올라 후다닥 밥을 안쳤다.

중요한 일이 있는 날은 밥심이 젤로 중하다.


5시 50분 남편 기상. 전기밥솥 밥은 완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기어가는 전기밥솥을 째려보다 결국 햇반을 데웠다.


'아.. 이젤. 이젤 가져간다고 했지.'

'어라. 양복은 안 입고 가져가려나. 저 상태로?!'

쓸 날 있겠지 싶어 챙겨둔 양복 커버를 찾았다.

옷장 옆에 세워 둔 이젤을 꺼내 먼지를 털고 닦았다.


'아... 국! 국!' 만들어 둔 된장국도 다시 끓였다.



05

신발장 앞에서 신발을 고르고 있는 남편을 보고서야

'아... 신발!'


"여보, 오늘은 체사레 파조티가 좋을 것 같은데..."

남편의 유일한 명품 구두. 귀한 날 귀하게 신는 구두다.

"어.. 그게 좋겠네." 남편도 동의했으나

구두에 퍼져 있는 곰팡이 꽃을 본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괜찮아, 닦으면 돼." 이번에도 남편은 그저 괜찮아.


내가 모를까. 그대로 주면 오전 내내 바쁘다 바빠하다가

숨가쁘게 행사장으로 달려갈걸.

종이가방에서 신발을 꺼내고서야 

'아! 곰팡이!' 하며 쓱쓱 휴지로 몇 번 닦고 말겠지. 


"일단 주차장에서 차부터. 그래야 이젤을 싣지. 신발은 종이가방에 담아줄게요."

남편이 차 빼러 간 사이 쫓기는 마음으로 구둣솔과 약을 찾았다.


현관 밖에서 슥슥 곰팡이 꽃을 털어내다

결국 신발 솔을 신발과 함께 담았다.


06

"트렁크? 뒷좌석?"

이젤을 뒷좌석에 넣으면 꺼낼 때 골치다. 문을 활짝 열어야 빼낼 수 있다. 

서울 도심에 차문 활짝 열 수 있는 주차장이 몇이나 될까. 

차를 애매하게 세우고, 이젤을 빼고 다시 주차구획 안에 주차를 해야 할 테지.


나의 이런 세심함은 읽지도 못했는지, 

마음 바쁜 남편은 결국 퉁명스럽게 툭.

"그냥 눕혀서 넣어. 눕혀서." (대충 빨리 넣어. 시간 없어라는 의미.)


'아 나도 눕혀서 넣고 싶거든요. 

뒷좌석에 뭐가 있잖아. 얇은 아크릴로 된 이것, 망가지면 안 될 것 같은데...'

이젤을 들고 머뭇거리자 남편은 다시 

"세워서 넣으면 되잖아, 세워서."


'아놔. 아까는 눕히라며!!! ' 평소의 나라면 벌써 버럭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귀한 행사가 있는 날이니까

말없이 차 문만 쾅.


그대로 출발할 줄 알았는데 

운전석 반대편 창문을 내리고 남편이 이런다.

"다녀올게."


결혼 15년 차쯤 되면 보인다.

네 글자 안에 숨겨진 이쁜 어떤 말.

- 미안해.

- 고마워.

- 사랑해... 는 있을까? (장담할 수 없음.)


07


친정엄마 생각이 났다.


"그냥 가도 된다니까!" (달랑거리는 블라우스 단추를 기어이 다시 달던 엄마에게.)

"진짜 시간 없다니까." (내 구겨진 재킷을 다리는 엄마에게.)

"안 먹는다고요. 안 먹는다고!" (이거라도 마시며 가라고, 미숫가루 담은 물병을 건네는 엄마에게.)


나의 무수한 짜증+심통+툴툴거림을

다 받아줬구나, 울엄마. 

어떻게 그랬을까, 엄마는.


쓰다보니 눈물나서 후다닥 THE END.


+

p.s. 남편 하지 못한 말이 있어요. 

와이셔츠 소매는 절대 다림질 하지 말라 했는데... 내가 그만...  그리도 중하게 여기는 와이셔츠의 칼각(?)이 그러한 연유로 두 줄이 되었음을 알립니다. 아임 쏘 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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