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빈 유니버스> 담대한 범인들의 투쟁기
<수리남> <범죄와의 전쟁>을 중심으로
"너 같은 놈을 반달이라고 한다며? 건달도 아니고 그렇다고, 민간인도 아니고, 넌 도대체 뭐냐"
윤종빈 감독의 첫 흥행작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깡패 잡는 검사 조범석(곽도원 역)은 최익현(최민식)을 심문하면서 이렇게 묻는다. 부산에서나 좀 날리던 최형배(하정우) 패거리를 전국구 조직으로 일으킨 배경에는 최익현의 혀 놀림이 있었다. 세관 공무원 출신으로 조직의 비리를 홀로 떠안아 쫓겨난 최익현은 없는 형편에 동생 식구까지 챙기는 볼품없는 가장이지만, 배짱 하난 두둑하다. 마약 밀수 현장에서 흉기로 위협하는 두 명의 성인 남성을 홀로 맞서는가 하면, 장물을 되팔기 위해 조폭과 마주한 자리에서 항렬을 들먹인다. 이어진 폭행과 협박 속에서도 그는 좀 더 권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결국 최후의 승자로 살아남는다.
별 볼이 없는 평범한 인물이 성장을 거듭하다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진행은 흔한 클리셰다. 하지만 윤종빈 감독의 몇몇 작품에서 이들은 애초에 완성형에 가까운 캐릭터로 등장한다. 단지 인생의 방향이 달라 그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을 뿐,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을 때 극을 지배하는 먼치킨으로 활약한다. 이 세계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닌데도 압도적인 재능으로 상황을 지배해나가는 장면들은 아이러니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니는 이거 (주먹) 내는 요거 (머리) 우리 이번 기회에 우리 둘이 힘을 합쳐가~ 제대도 한번 일을 벌여보자.. 이 우주의 기운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 아이가?"
깡패들의 생리를 더 잘 이해하는 비리 공무원. 최익현은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깡패들 속에서 타고난 처세술과 입담, 사업수완으로 '무대 뒤의 두목'으로 군림해간다. 그러나 최익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재능은 깡패보다 더 단단한 깡다구다. 옛 상사를 시원하게 패 버리고, 수갑 찬 주제에 자신에게 윽박지르는 경찰마저 후 드려 까는 그 깡이 최형배로 하여금 최익현을 매료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한편으론 조폭이라고 하기엔 껍데기뿐인 그가 하늘을 쫓다 추락해버린 이카루스처럼 끝내 좌절을 맞이하게 될 거란 긴장감을 조성한다. 호랑이가 늑대들의 왕이 될 수 없듯 조직에서 최익현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그의 존재는 건달의 정통성을 해치는 눈엣가시가 되어간다. 깨진 거울 속에 비친 수많은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는 최익현 역시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서 극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요동친다.
"삶은 여전히 무거웠다. 살아가기 위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변화가 필요했다."
윤종빈 감독의 최신작 <수리남>의 주인공 강인구(하정우)의 여정도 비슷한 서사를 지닌다. 없는 집안에서 자라나 동생들의 학업마저 책임져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닌 강인구의 삶 역시 최익현과 마찬가지로 끝없는 가장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있다. 결핍은 갈구를 낳고 갈구는 욕망으로 진화한다. 가난에 절어진 사람은 늘 돈을 탐할 수밖에 없다. 배고픔이 새긴 생채기는 지워지지 않는다. 평범한 소시민인 최익현과 강인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안정적인 일터에서 쫓겨나게 된다. 집에는 생때같은 자식과 마누라는 나만 쳐다보고 있다. 내 자식은 나처럼 살아선 안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막다른 절벽은 별 볼일 없는 아저씨도 각성케 한다.
최익현이 최형배라는 귀인에게 베팅을 했다면, 강인구는 친구 박응수(현봉식)에게 인생을 걸었다. 다만 최형배는 깡패의 세계에 녹아들어 군림했지만, 응수는 수리남의 순진한 외지인에 지나지 않았다.
"나 같이 평범한 사람 이렇게 인생 망쳐 놓는 게 국익이야?"
첫 단추는 잘못 뀄으나 강인구 역시 전요환(황정민)이라는 극의 흑막에게 신뢰를 쌓아 오른팔의 위치에 오른다. 오직 돈이라는 확고한 목적의식을 지닌(척한) 강인구의 집념에 매료된 것이다. 최익현은 성공, 강인구는 복수라는 매개로 이들은 생소한 세계를 제 집인양 완벽히 적응해나간다. 국정원의 도움도 있었지만, 강인구는 수 차례 죽음의 고비에서도 끈질기게 목표를 향해 돌진한다. 노련한 요원
최창호(박해수)가 그의 대담함에 놀랄 정도다.
최근 시청자들의 트렌드는 과거 한국 콘텐츠의 정석으로 통했던 '고구마 전개'를 거부한다. 일본 인기 만화 <원펀맨>처럼 짧은 시간에 시원시원하게 상황을 종결짓길 선호한다. 그런 면에서 앞선 두 작품은 빠른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최익현과 강인구는 마치 경력직 신입처럼 새로운 무대에서 단기간에 정상에 오른다. 성장형 캐릭터가 보여주는 주저함도 찾아볼 수 없다. 타고난 재능에 거침없는 행보로 마침내 세계관의 지배자마저 꺾어 버린다.
"이거 작전 아니에요. 나 살려고 발버둥 치는 거지"
권력과 건달, 카르텔과 국가. 두 이질적인 세계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최익현과 강인구는 살기 위해 치열해진다. 오직 생존만을 위해 주변 인물들을 제끼고 배신하다 끝내 세계관 최강자를 꺾는다. 때론 비열하고 때론 능청스러운 이들이 왠진 밉진 않다. 윤종빈 유니버스에 나오는 아저씨들에게 끌리는 건 도전의 연속인 우리네 세상살이를 투영하려는 심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