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프, 성난 사람들을 보고
에이미와 대니얼, 그들에게 쌓여있는 스트레스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아는 유형의 것은 아니다.
다만, 세상에서 내 몫의 책임을 지고 혹은 내 주변의 몫까지를 짊어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철에 녹이 슬듯이 몸과 마음에 무언가가 적재되어 간다는 감각만은 이해가 간다.
어느 날 평소와 다르게 화가 치솟다가 이내 후회하고
또 사람들 사이의 크고 작은 균열에서 다가오는 다양한 종류의 녹들
에이미와 대니얼도 각자의 녹을 잔뜩 눌러 담은 채 어느 날 마트 앞 주차장에서 마주하게 된다.
두 인물의 묵혀있던 분노와 스트레스는 서로를 향한다.
처음엔 서로의 집, 차에 피해를 주고받던 복수의 규모는 두 인물을 둘러싼 인간관계까지 나아간다.
이 복수의 과정은 긴장감과 콘텐츠적 재미를 유발하며 점점 더 강한 자극이 되어가는데
마치 그들은 그 복수를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으로 쓰는가 싶기도 하다.
관람하는 시청자의 입장에서도 점점 더 높아지는 자극에 몰입이 깊어지는 재미가 있었다.
가볍게 보았지만 가벼움이 점점 사라지며 더욱 강해지는,
우연과 관계가 얽히고설켜서 종래에는 본인들의 의지보다도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하는 이 둘의 관계.
( 이후의 글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참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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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단계에서 비프의 두 인물은 관계의 극점에서 완전히 다른 극점으로 이동하게 된다.
환각에 취해 타인과 나의 경계를 허물고
끝끝내 감춰진 결핍을 공유하고 위로하는 일
결국 방향감각 없이 날뛰는 불안과
분노를 다스리는 가장 큰 처방이
나에게 너를 포개는 이해와 동일시라는 점은 좋은 결말이다
특히나 분노가 만연한 지금에 마주해야 할 서사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정말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함께 독식물을 잘못 먹는 사건이 없이도, 외롭고 고단치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들이 서로를 인식하는 일련의 과정은 사실 타인이 아닌 "나"를 인식하는 과정이다.
마지막화 "빛의 형상" 칼 융의 문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사람은 빛의 형상들을 상상하는 것으로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자신이 품고 있는 어둠을 의식으로 만들어야만 깨달음이 따르게 된다.
자신의 어둠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의 어둠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자기> Self와 <자아> Ego 가 있다.
칼융이 말하는 자기실현은 <자아>가 저 어두운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는 <자기>를 발견해 내는 것이다.
자기 인식은 자기실현에 이르는 길이며, 완전한 자기의 실현을 이룩하기보다는
자기를 인식하기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융은 강조한다.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적으로 만듦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본성과 더욱 조화를 이룬 생활을 누릴 수가 있고
초조와 욕구불만을 느끼는 경우도 적어질 것이다.
자기 자신의 무의식 속의 그 기원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무의식을 모르는 사람은 무의식의 억압된 요소를 남들에게 투사한다.
즉, 자기 자신의 결점을 자각하지 않고, 그것을 남들에게 전가시켜 남들을 비난하고 힐난한다.
출처 : Tong - forme13님의 심리학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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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태어나서 이런저런 선택을 하다가 정신이 들어보니 여기네”
나는 지금 어디쯤에 서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