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너는 기억할까
‘하아... 하아...’
하얀 눈밭을 설은 하염없이 걷고 있다.
1년 전 그날도 역시 오늘과 같았다.
큰 도로변에서부터 차들은 더 이상 들어오지 못했고, 그때처럼 여전히 큰 배낭을 등에 업고 걸을 때마다 푹푹 들어가는 젖은 발을 의지하며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걷고 있다.
조금만 더 걸어 들어가면 그날의 모든 기억이 숨 쉬고 있는 펜션에 도착할 것이다.
그 행복 하나만을 생각하며 그리고 그날의 우리를 떠올리며 무릎까지 시리도록 올라오는 차디참을 견디며 걸어가고 있다.
온통 세상이 하얗다.
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상이 하얗다.
단지 색깔을 띠고 있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과 파란 하늘을 닮은 설의 비니 모자 그리고 추위에 닳아 오른 설의 빨간 두 볼뿐이다.
‘멀리서 보면 눈사람이 걷는 줄 알겠네... 흰 패딩이 무슨 보호색도 아니고.’
온통 눈밭인 땅에 흰 패딩을 입고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웃겨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모든 것을 접고 다시 여기로 달려오리라 마음먹고 난 후에는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빨리빨리 정리하고 다시 그곳에 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패션 코디 따위는 생각도 못했다.
얼어 죽겠는데 무슨 코디... 가지고 있는 가장 두꺼운 패딩과 스키 바지 그리고 부츠를 보이는 대로 껴입고 신고 배낭 하나 메고 무작정 떠나왔다.
추운 한겨울 날씨와 어른 무릎 약간 밑까지 내린 폭설로 오전 10시인데도 불구하고 거리에 사람이라고는 없다.
집집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연기와 간간이 퍼져 나오는 음식 냄새만이 여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 알리고 있을 뿐이다.
뉴스에서는 연신 폭설 뉴스를 쏟아내고 있었고 며칠은 눈이 더 내리니 대비하라는 얘기뿐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설은 조금만 더 걸어가면 그곳에 도착한다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걷고 또 걷는다.
설의 코가 빨갛게 얼어가고 있다.
‘히로사키’ 펜션의 간판이 보인다.
하얀 눈으로 덮인 펜션의 모습이 보인다.
1년 전과 같은 모습의 눈 덮인 펜션을 보니 설의 마음은 뜨거워졌고 숨소리는 거칠어졌으며 오랜만에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이 느껴졌다.
‘다 왔다... 하아... 하아... 다시 돌아왔다.’
기쁜 마음으로 한걸음에 펜션에 다다랐다.
문을 열고 들어가 일 년 전에 묶었던 그 방 안으로 들어간다.
방 안의 가구며 냄새며 익숙한 듯 낯선 다다미방의 모습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일 년 전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설 자신뿐 모든 것이 그대로임을 확인하고 나서 왠지 모를 안도감과 서러움이 밀려온다.
우리 사이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라 안쓰러운 확신을 하며 창문을 활짝 연다.
이내 찬 공기가 방안을 휘어 감다 다시 밖으로 나간다.
“후아~~~”
크게 숨 한번 들이마시고 내쉬고를 반복하며 진짜 아오모리에 있음을 다시 돌아왔음을 또 한 번 확인하고 나서야 창문을 닫는다.
‘똑똑’
펜션 주인이 따뜻한 차를 내어준다.
가지런하게 놓인 작은 찻잔에 따뜻한 우렁차가 모락모락 연기를 피올리고 있다.
차를 받아 들고 테이블 앞에 앉아 차의 향기를 맡는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펜션 주인의 따뜻한 인사말에 설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본다.
“이번에도 오래 묵으시네요.”
“네... 아주 아주 오래 묵을 생각이에요... 어쩌면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기에는 짐이 너무 가벼운데요?”
“폭설로 차가 못 들어와서.. 짐이 아직 공항에 있어요... 일단 당장 필요한 것만 배낭에 넣어왔어요.”
“그렇군요... 짐이 들어오려면 며칠은 더 기다려야겠어요. 내일도 계속 눈이 온다네요... ”
한참 얘기를 이어가던 펜션 주인이 조금 뜸을 들인 후 조심스레 설에게 다시 말을 건넨다.
“... 혼자 오신 건가요?”
차를 마시던 설은 찻잔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내린 후 펜션 주인을 쳐다보며 대답한다.
“... 네... 혼자예요.”
“간간이 TV에서 그분을 봤어요... 여전히 잘 만나고 계신 거죠?”
펜션 주인의 물음에 설의 마음이 아려온다.
“아니요... 저도 간간이 TV로 볼 뿐인걸요...”
“그렇군요... 제가 괜한 질문을 했네요... 일 년 전 두 분의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려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아서... 조금 궁금했어요.”
설의 눈이 떨려온다.
그리고 이내 눈 가장자리가 빨갛게 물들어간다.
다시 찻잔으로 손을 옮겨 찻잔의 따뜻함을 느끼며 마음의 평온을 애써 가지려 한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해요... 그날의 저는 가장 빛이 났어요. 제 기억에도 그래요... 어쩌면 빛나던 그날의 제가 그리워 다시 돌아온 건지도 모르겠어요... 여기 아오모리에 오면 다시 제가 빛나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하지만 혼자서는 빛나지 않겠죠? 일 년 전도 혼자서는 빛나지 않았으니까...”
빨갛게 달아올랐던 설의 뺨 위로 눈물 한 가닥이 흘러내린다.
펜션 주인은 그런 설을 쳐다보며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그럼 쉬세요... 오래 머무르셔도 괜찮아요... 그저 좋은 추억만 기억하시다 가시길 바라요.”
펜션 주인은 문을 닫고 조용히 나간다.
설은 빨갛게 달아오른 눈시울을 닦으며 차 한 모금을 더 마신다.
피곤한 몸을 일으켜 패딩을 벗은 후 이불 안으로 들어가 잠시 몸을 누운다.
이내 스르르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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