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_설(雪)

#9. 친구 말고... 연애할래요?

by 묘해

아침이다.

설은 간밤에 이 감독과 술자리를 나누다가 방에 돌아왔다.

여행지라는 메리트 덕분인지 평소 술을 먹지 않는 설은 꽤 많은 술을 마셨고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은 채 방에 들어와 잠이 들었었다.


‘다들 돌아갔겠지?’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어제와는 다르게 밖은 조용했다.

괜한 아쉬움과 심지어 서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지민과의 만남이 못내 아쉬웠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영화 개봉 때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본들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대체 뭘 어쩌자는 걸까?

복잡한 마음으로 설은 욕실에 들어가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갔다.

펜션 주인이 펜션 뒤에 야외 온천이 있다고 한 말이 기억이 났다.

조만간 밤에 야외 온천에 가봐야겠다 생각을 하고, 어제 하지 못한 시내 구경을 하기 위해 설은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깔끔하게 화장을 하고 살구빛 립스틱을 살짝 발랐다.

회색 니트와 감색 롤업 코듀로이 팬츠를 입고 가죽 재킷을 걸치고 갈색 앵클부츠를 신었다.

‘그래. 어제는 어제고 나는 지금 여행 중이니 기분이나 내보는 거야. 좋은 일이 생길지 누가 알아?’

가방에서 스카프를 꺼내어 목에 둘렀다.

이제야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작은 카메라 가방을 크로스로 메고 밖을 나섰다.


며칠 전과는 다르게 오랜만에 밖은 따뜻했다.

햇살로 가득 차 앙증맞은 정원은 반짝이고 있었고, 하늘은 맑았다.

설의 기분은 더더욱 좋아졌다. 펜션 문을 열고 나와 조용한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아오모리의 길들은 마치 영화 세트장 같았다. 가게와 건물들이 아기자기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에 출연한 것 같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거리를 조금 더 거닐다 아침 겸 점심으로 장어 덮밥을 먹을 계획이었다.

펜션 주인이 추천해 준 우나산으로 갈 계획이었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설은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이어폰에서 노래가 흘러나왔고 설은 여행 기분을 한껏 느끼며 걸어가고 있었다.

순간 바람이 불어 설의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휘날렸고 그 바람에 목에 메고 있던 스카프가 뒤로 날아갔다.

설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몇 발자국 떨어진 뒤에서 지민이 땅에 떨어진 스카프를 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설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지민은 설의 스카프를 손에 쥐고 천천히 설에게 다가왔다.

그 모습에 설의 심장은 미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지?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나 따라온 거야? 왜? 왜?’

“당신 건가요?”

지민은 설에게 스카프를 내밀며 말했다.

‘당신? 지금 당신이라고 했나? 뭐지, 이 설정은?’

“네?”

“스카프 당신 거 아니냐고요.”

“네??? 아... 아닌데요?”

“ 예? 아니라고요? 제가 뒤에서 봤는데? 당신 목에 걸려있던 스카프가 바람에 날아가는 거 다 봤는데?”

“그러니까요. 제 꺼 아니라고요... 버... 버린 거예요.”

“예? 버렸다고요? 조금 전까지 당신 목에 있었다니까?”

“버렸다고요... 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지자 설은 당황하며 말도 안 되는 말을 계속 지껄이다가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가려던 찰나 지민이 설의 손목을 잡았다.

설은 잡힌 손목이 너무 뜨거워 온몸이 타버릴 것만 같았다.

“버렸으니 이거 내가 가져도 되죠?”

“마... 마음대로 하세요.”

“그럼 지금부터 내 꺼입니다. 내 꺼 해도 되지요?”

“마음대로 하시라니깐요.”

“그럼 내 꺼합니다. 이제.”

‘내 꺼’라는 말이 묘하게 설레게 들렸다.

그리고 묘하게 슬프게도 들렸다.

그나저나 왜 ‘당신’이라고 하는지 궁금했다.

그보다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가 더더욱 궁금했다.


“그거보다 왜 여기에 계세요?”

“여행 중이에요.”

“아니... 촬영 중이잖아요. 촬영 안 해요? 혹시 땡땡이?”

“예? 땡땡이?”

지민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배를 잡고 웃었다. 웃느라 몸이 폴더처럼 접혔다.

‘아니. 그 말이 그렇게 웃긴가? 어느 포인트에서 웃긴 거야? 사람 민망하게.’

한참을 웃던 지민은 겨우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땡땡이는 아니고요, 저는 한동안 촬영신이 없어서요.

아시잖아요... ‘그녀는 진심이었다’에서 남주는 초반에 신이 없는 거... 직접 쓰셔놓고는.”

“그럼 한국에 돌아가야지. 왜 혼자 여기 이러고 있어요?”

“여행 중이라니깐요.”

“설마 매니저도 없이 혼자 이러고 있는 거예요?”

“네. 매니저도 없이 혼자 이러고 있네요. 내가...”

“아니, 왜요?”

“음... 아오모리의 매력이랄까요? 궁금해졌어요. 아오모리가...”

“아오모리가?”

“네. 아오모리가... 그리고 당신이.”

“네?”


지민의 느닷없는 말에 설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결국 그의 말은 촬영신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이 아오모리에 매니저도 없이 홀로 남아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 이유는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말이 아닌가.

“제가 궁금하다고요? 뭐가요?”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요,.. 좀 알아볼까 해서요.”

“그런데 왜 자꾸 당신이래요? 나 한 설인데? 한 작가인데?”

“맞아요... 그래서요.”

“뭐가 맞고 뭐가 그래서예요?”

“당신 한 설 작가 맞고요.

작가님이라고 부르면 그 프레임에 제가 갇힐 것 같아서요. 제가 알고 싶은 건 당신인데...”

“하...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그럼 여행 재미있게 하시고요. 저는 이만...”

돌아서려는 설의 앞을 지민이 막아서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기왕 이렇게 된 거 같이 구경하지 않을래요? 혼자보다는 둘이 낫잖아요.”

“아니요. 저는 혼자가 더 나아요.”


설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지민을 지나 앞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며 뒤를 살짝 돌아보니 지민이 따라오고 있었다.

순간 설은 다행이다 생각했다. 내심 이대로 지민이 가버리면 어쩌나 싶었다.

그럼에도 매몰차게 지민을 대한 건 이미 설의 마음이 지민에게 향해 있었고 그러한 마음을 들켜 버릴까 겁이 나서였다.

설은 다시 아오모리 거리를 만끽하며 걷고 있었다.

작은 샵을 발견하면 가던 길을 멈추고 가게 안을 들여다봤다.

예쁜 소품이 가득한 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옆을 보니 지민 또한 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이내 설과 눈이 마주쳤다.

“아. 진짜 왜 자꾸 따라와요?”

“따라가는 거 아니라고 말 안 할게요. 우리 같이 놀아요.”

“놀아요?”

“그럼 데이트해요. 우리.”

“왜 내가 지민씨와 데이트를 해야 하죠?”

“왜냐면 내가 당신한테 관심이 있으니까요.”


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고 싶었지만 설의 스카프는 지민의 목에 감겨 있었다.

설의 얼굴을 쳐다보며 지민은 해맑게 웃었다.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고 지금부터 데이트합니다. 우리.”

지민은 설의 옆에 나란히 섰다.

설이 한 발자국 내밀 때마다 설과 발을 맞추어 한 발짝씩 앞으로 걸어갔다.

어이없어하는 설을 보며 지민은 아이 같은 해맑은 웃음을 보였다.

그의 웃음에 설은 자신이 이미 졌음을 느꼈다.


길 건너편에 ‘우나산’이 보였고 설과 지민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장어 좋아해요?” 라고 지민이 설에게 물었다.

“아니요. 펜션 주인이 맛집이라고 소개해주길래 먹어봐야겠다 싶어서요.”

“머 좋아해요?”

“뭐라니요?”

“음식이요.”

“떡볶이요.”

“떡볶이요?”

“네. 떡볶이요.”

“저 맛있는 떡볶이집 많이 아는데 나중에 서울 가서 같이 먹으러 갈래요?”

“예?”

“덮밥 나왔다, 그럼 먹어볼까요?”


훅훅 들어오는 지민의 말에 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지 일단 밥을 먹고 찬찬히 물어봐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아~ 맛있어서 너무 많이 먹었어요... 장어 덮밥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네요.”

장어 덮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 설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네요. 정말 맛있는데요. 펜션 주인에게 고맙다고 해야겠어요.”

“왜 지민 씨가 고맙다고 해요? 혹시 거기에 묵어요?”

“네. 거기에 묵어요.”

“왜요? 좋은 호텔도 많은데... 왜요?”

“좋은 사람이 거기에 있어서요.”

“우리 차나 한잔하죠.”

“그러시죠. 아까 오는 길에 작은 카페를 봤어요. 그리로 가요, 우리.”



작은 카페에 손님이라고는 설과 지민 둘 뿐이었다.

조용하게 마주 앉아있는 설과 지민에게 카페 주인은 따뜻한 커피 두 잔을 대접했다.

삼색 고양이가 그려진 도자기 찻잔을 어루만지며 설은 지민에게 말을 했다.

“그럼 이제 얘기해보시죠.”

작은 찻잔을 쳐다보던 시선을 설에게 옮기며 지민이 말을 했다.

“뭘요?”

“저한테 왜 이러는지 말이에요.”

“왜라뇨? 제가 뭘 이래요?”

“자꾸 같은 말 시킬 거예요?

왜 지민 씨가 여기에 이러고 있는지, 왜 나한테 당신이라고 하는지. 그리고...”

“그리고?”

“왜 우리가 데이트라는 이름을 달고 마주 앉아 있는지...”

“아까 얘기한 것 같은데... 프레임에 갇히기 싫었다고...”

“작가와 배우가 맞는데 그게 왜 프레임이죠?”


지민은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설에게 말했다.

“커피 식어요... 마셔 봐요... 당신이 좋아하는 과테말라예요.”

“예? 제 커피 취향은 또 어떻게 알고 있죠?”

“전에 인터뷰에서 읽었어요.

커피 마니아인데 그중에서도 과테말라와 콜롬비아를 좋아한다고...

다크하고 스모키 한 맛을 즐기시네요... 어울려요.”

“제 질문은 그게 아니잖아요? 왜 우리가 프레임에 갇히면 안 되죠?”

“아무것도 못 할까 봐요...”

“무슨 말이에요? 뭘 못해요?”

“작가와 배우라서요... 그럼 용기를 못 낼 것 같아서...”

“그러니까요... 왜! 무슨 용기를 내야 되냐고요. 대체!”

“작가인데 눈치 되게 없으시다. 상상력도 안 좋은 거 같고...”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시는 지민에게 설은 소리쳤다.

“서지민 씨! 지금 나랑 장난해요?”

“관심 있어요.. 나... 당신한테...”

지민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설을 쳐다봤다.

지민의 진지한 모습에 설은 얼굴이 붉어졌다.

“당신한테 관심 있어서 이러는 거예요.

그런데 작가와 배우라는 프레임 때문에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 스스로 그 프레임을 벗었어요.

그래서 매니저도 없이 혼자 여기 이러고 있고요.”

“그래서 아오모리에 있는 거예요?”

“아니요.”

“예? 아니라고요? 지금 아오모리에 있잖아요.”

“당신이 여기 있기 때문에 저도 여기 있어요. 마침 당신도 혼자이기도 하고.”

설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런 설을 바라보며 지민은 말을 이어갔다.

“사실 나는 당신이 있는 곳에 있었어요. 항상은 아니지만 가능하면 있었어요.”

깜짝 놀라 설이 지민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저는 지민씨를 어제 처음 봤는데?”

“저 작가님 대학 후배예요.”

“후배요? 나보다 어려요? 아.. 어릴 거라 생각은 했는데. 얼마나 어려요? 지금 몇 살이에요?”

설의 쏟아지는 질문에 지민은 또 아이 같은 웃음을 웃었다.

그의 웃는 얼굴에 또 한 번 넋이 나가는 설이었다.

“작가님은 진짜 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시는구나. 저 작가님보다 다섯 살 어려요, 올해 서른이에요.”

“다섯 살 밖에 안 어려요? 20대인 줄 알았네...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에요?”

“아니요, 됐고요... 학교 후배라고요? 그때도 저 알았어요?”

“네. 그때도 알았어요.”

“어떻게요?”

대답 대신 지민은 카운터를 바라보며 카페 주인에게 커피 리필을 부탁했다.

설의 커피잔에도 다시 따뜻한 커피가 채워졌고 둘의 퍼즐 맞추기는 계속되었다.


“대학 신문사에 실린 작가님 글을 처음 봤어요.

제일 기억에 남는 글이 마이 앤트 메리 노래에 대해서 쓴 글...”

“특별한 사람?”

“네, 특별한 사람이요... 아직도 생각나요... 한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다...로 시작하던 작가님 글...”

“그 글이 왜 기억에 남죠?”

“저 그때 그 노래 듣고 있었어요. 저도 많이 좋아하는 노래거든요. 그 노래에 대해서 쓴 작가님 글을 보고 마음이 아팠어요...

이 사람 정말 보통 사람이구나... 평범한 사람으로서 세상을 아주 힘겹게 살아가고 있구나... 나랑 닮았네...라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그때 저 힘들었어요... 공모전에 계속 떨어지고 있어서 글을 계속 써야 하나 그만둬야 하나 한참 고민하던 때거든요.”

“느껴졌어요. 작가님을 제대로 알지는 못 했지만 왠지 알 것 같았어요. 나와 닮은 사람이구나 느껴졌어요.”

“그럼 그때는 왜 말 걸지 않았어요? 왜 가만히 있었죠?”

“김도겸 대표 때문에요.”

“도겸이요? 왜요?”

“작가님 애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작가님 옆에 항상 김도겸 대표가 있어서... ”

“애인이라니요! 아니에요!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라고요... 그 자식이 나를 얼마나 부려먹는데! 지가 무슨 흡혈귀도 아닌데 내 피를 아주 쪽쪽 빨아먹고 있다고요. 아주 쪽쪽!”

발끈하는 설의 모습이 귀여워 지민은 큭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알아요. 애인 사이 아니고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인 거...

뭐 안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진작 알았으면 더 빨리 움직였을 텐데...”

“그럼 대학 시절은 그렇다 치고... 그 후에는 왜 연락 안 했어요? 왜 안 나타났어요? 팬 사인회도 많이 했구만.”

“저... 얼마 전 북 토크에도 갔었어요.”

“왔었다고요? 못 봤는데? 이런 얼굴을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순간 마음속의 말이 나와 설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커피잔을 만졌다.

“제 직업이 그래서 앞에 나서지는 못하고요. 조용히 무대 뒤에서 봤어요.

그리고 작가님이 사회자분 멋지게 회 쳐드시는 것도 물론 다 지켜봤고요.”

“흠... 뭘 또 회까지... 그런데 지금은 왜 나타난 거죠?”


지민은 테이블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개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작가님 소설들을 보며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라고 생각을 많이 했어요.

마침 ‘그녀는 진심이었다’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지금이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소속사에 무조건 이 작품 하게 해 달라고 말했고요.”

“그럼 어제 그 인터뷰 내용이 다 사실이네요.”

“네. 다 사실이에요. 작가님 팬인 것도, 소속사에 조른 것도 다 사실이에요.”

“그런데 오늘은 왜 굳이 프레임을 벗어요?”

“데이트하고 싶어서요.”

“작가랑 배우가 데이트할 수도 있잖아요... 뭐 친구가 될 수도 있고.”

“그거 보다, 데이트보다 더 많은 걸 하고 싶어서요.”

“많은 거라... 뭐요?”

“친구 말고... 연애할래요, 우리?”

빨갛게 달아오른 설의 얼굴을 보며 지민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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