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궁금해졌어
“여보세요. 네... 감독님... 오늘 촬영 끝나셨다고요? 고생하셨어요...
아.. 저는 잠시 시내 구경 중이에요... 저녁요? 아뇨.. 저는... 다들 모여있는 자리 부담스러워서요... 네네... 네? 서배우 가요? 아... 뭐,.. 일정 보고 참석할 수 있으면 할게요... 네... 이따 뵈어요...”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를 몹시도 불편해하던 평소의 설과는 다르게 조금 전 시작한 시내 구경을 바로 끝내고 급하게 펜션으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가 입고 있던 옷을 다 벗고 샤워를 하였다.
가지고 온 마스크팩을 하고 곱게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저 인간들 사이에서 비련의 오징어가 될 수는 없지. 기왕 이렇게 된 거 최선을 다해 보이겠어.
내 미모도 아직은 죽지 않았다고. 오늘은 내가 보여주지, 모두에게... 나의 이 빛나는 미모를... 하하하.”
할 수 있는 한 도치의 최대로 공을 들여 곱게 화장을 하고 마스카라까지 하고 난 설은 핑크빛 립스틱을 꺼내어 입술에 톡톡 펴 바르고 거울을 보았다.
“음... 화장은 이 정도면 됐고... 옷을 머로 입나~~~
이럴 줄 알았으면 신경 써서 좀 가지고 올 걸... 죄다 트레이닝 복 뿐인데... 멀 입지?”
옷장을 열어 한참을 고민하던 설은 베이지색 니트에 베이지색 롱스커트를 입고 하얀색 롱 카디건을 걸친 후 밖으로 나갔다.
앙증맞은 정원 한가운데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모닥불 주위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었다.
이 감독은 바비큐 준비가 한참이었고 두 주연배우는 담요를 무릎에 덮은 채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지민은 연신 미소 띤 얼굴로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한 작가 왔어? 이쪽으로 와서 앉아.”
이 감독의 말에 사람들이 한 설을 쳐다보았다.
서지민도 고개를 돌려 한 설을 쳐다보았고, 오전과는 사뭇 다른 차분하고 단아한 설의 모습에 잠시 멍해져 있다가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제가 껴도 되는 자리인지 모르고 나왔어요. 감독님이 초대하셔서...”
“무슨 소리야... 오늘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한 작가인데... 한 작가 작품이잖아... 다들 안 그래?”
머쓱해하는 설에게 사람들은 웃음을 보였고 그런 모습에 조금 안심이 되는 듯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맞은편에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지민을 잠시 쳐다보았다.
‘아... 신이시여... 한 사람에게 능력을 몰빵 해주셨네요... 과연 당신의 작품입니다... 인정, 인정.’
너무 흐뭇하게 바라봐서일까...
눈길을 느낀 지민은 설을 쳐다보았고, 지민과의 눈 맞춤에 놀란 설은 지민이 아닌 모닥불을 쳐다보는 척 애써 그의 눈을 피했다.
그때 무릎에 덮고 있던 담요를 집어 들고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가는 거야? 나 이제 왔는데? 나 인간으로 보이려고 두 시간을 씻고 바르고 입었는데? 진짜 가는 거야?’
지민은 설을 향해 걸어왔다. 웃음기 사라진 표정으로 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지금 오는 거야? 나한테? 왜? 나 도망가야 하나? 들키는 거 아냐? 엄마야...’
설 앞까지 걸어온 지민은 안절부절못하는 설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고 설 옆에 앉았다.
깜짝 놀란 설은 지민을 쳐다보았다.
“작가님. 추워 보여서요...”
“아... 감사합니다.”
바로 옆에 앉아있는 지민 때문에 설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 빠르게 뛰었고 심장 소리가 옆에 앉아있는 지민에게 들릴까, 들킬까 더더욱 안절부절못하였다.
“오전과는 다른 모습이네요, 작가님.”
설에게 커피잔을 내밀며 지민이 말했다.
“네? 어떻게... 뭐가 다른데요?”
지민이 건네준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설은 지민에게 물었다.
“뭐랄까... 오전에는 굉장히 경쾌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단아해 보여서요...
많이 안정된 모습이랄까... 같은 분인데 왜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죠?”
“글쎄요... 아오모리가 주는 매력 덕분이 아닐까요?”
“그런가요? 저는 순전히 작가님 때문인 거 같은데...”
“네? “
지민은 알 수 없는 말을 설에게 던지고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 지민을 설은 찬찬히 들여다봤다.
따뜻해 보이는 베이지색 코듀로이 팬츠에 단정히 맞춰 입은 회색 카디건의 그의 모습을 설은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커피잔을 들고 있는 그의 손에 시선이 머물렀다.
길고 하얀 손가락, 잘 정돈된 깔끔한 손톱 그리고 새끼손가락에서 반짝이는 은색 반지...
저 반지의 의미는 뭘까? 설은 곰곰이 생각했다.
새끼손가락에 낀 걸 보니 애인과의 반지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배우라는 직업 특성상 어떤 의미의 반지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모습을 한참 쳐다보는 데, 지민은 설의 시선을 느끼고 말을 건넸다.
“왜 그렇게 보세요?”
“네?”
“계속 저 보고 계시잖아요...”
“아... 미안합니다.”
“그렇게 계속 보지 마세요.”
“네?”
“긴장되어서요.”
“네?”
“이봐! 한 작가! 지민 군! 이리 와서 고기 좀 먹으라고! 둘이 대체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는 거야?”
“네! ”
지민은 이 감독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바비큐 중인 이 감독에게로 걸어갔다.
그런 지민을 보며 설은 아쉬워했다. 조금만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무엇이 긴장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 반지는 뭐냐 물어보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오늘이 끝나가는 것이 아쉬웠고, 안타까웠다.
그와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 싶었다.
내일이면 그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겠지? 어쩌면 한국으로 돌아가겠지?
알 수 없는 섭섭함과 슬픔에 잠긴 채 그리고 이 감정이 무엇인지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는 채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