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우리 연애합니다.
“저 성이 히로사키 성인가?”
자전거로 내달린 지 20분 정도가 지났을 때 성의 모습을 갖춘 건축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히로사키 성 맞아.”
자전거를 달리며 지민은 설을 쳐다보았다. 한껏 상기된 표정의 설의 얼굴에 지민은 다시 설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 와 봤어? 아오모리는 처음이라고 안 했어?”
“와 본 건 아니고 사진으로 봤는데 이번 여행에 꼭 와야겠다 생각할 만큼 근사했어.”
“나와 같이 오게 되어서 더 기쁜 건 아니고?”
“맞아.”
“어?”
설의 솔직한 대답에 지민은 하마터면 자전거에서 넘어질 뻔했다.
그런 지민의 모습에 설은 까르르 소녀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오~ 한 설 작가님~ 밥 먹더니 힘이 나나 보네요. 훅 훅 들어오는데?”
설은 계속 웃으며 히로사키 성을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히로사키 성 앞에 도착해 둘은 자전거를 세워 두고 히로사키 성을 올려다보았다.
“우와... 멋지다.”
“오사카성보다는 좀 보잘것없지 않아?”
지민의 말에 설은 대답했다.
“아냐. 이 정도면 충분해.”
설의 말이 의아해 지민은 무슨 뜻이냐고 다시 설에게 물었다.
“나 다음 소설 구상 중이거든. 아오모리를 배경으로 해서 연인들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
“언제?”
“첫날... 아오모리 공항에서 첫 발을 내딛던 순간에 생각했어.”
“왜?”
“아오모리에 반했거든. 눈 덮인 길을 걷는 내내 생각했어.
아... 나는 아오모리와 사랑에 빠지겠구나.
이 아름다운 마을을 보고 과연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재간이 있겠는가...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이 들자마자 진짜 아오모리를 사랑하게 되었어.
그리고 산사나 성에 가보고 싶다고도 생각했고. 왠지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묘한 분위기의 그런 성...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성은 이미 충분해. 아주 묘해... 마음에 들어.”
행복한 표정으로 열심히 얘기를 하는 설을 보며 과연 어떠한 소설을 설이 만들어 낼까 지민은 내심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맞대고 섰다.
“나만큼... 나보다 더 마음에 들어?”
“어?”
설은 히로사키 성을 향하던 눈을 거두어 자신 앞에 가까이 서 있는 지민을 바라보았다.
“나보다 더 마음에 드냐고.”
“너와 함께 있기에 히로사키 성이 더 마음에 들어.”
설의 대답에 흡족한 지민은 환하게 웃었다.
“됐냐?”
“됐다.”
“은근 질투심이 많아.”
“그럼!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고 상상해오던 순간인데!”
“어? 기다려? 뭘 상상해? 어떤 걸?”
“그런 게 있습니다요,. 한 작가님~ 한 번에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세요... 심장에 무리 가요.”
지민은 환하게 웃으며 성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뭐지? 나 계속 심장에 무리가 가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설마 들렸나? 에이... 설마? 진짜? 헉.’
잠시 생각에 잠긴 틈에 지민이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설은 지민을 따라가려고 뛰었다.
헉헉 거리며 지민의 옆까지 뛰어오자 지민은 “아기 같아”라는 말을 하며 설의 손을 꼭 잡았다.
“히로사키 성 보니까 꼭 센과 치히로의 모험 같지 않냐? 그 애니메이션이 바로 생각나는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아니냐.”
설의 대답에 지민은 머쓱 한지 쓰고 있던 비니를 긁적였다.
“뭐... 하긴 영 틀린 말은 아니네... 모험을 하기는 하지.”
“그래서 설이 넌 어떤 연인들의 이야기를 쓸 거야? 아오모리에 사는 노부부 이런 콘셉트의 이야기인가?”
“글쎄...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고...
솔직히 작품 구상하러 여행을 가야겠다라고만 생각했고... 눈이 보고 싶어 아오모리를 선택한 것뿐이야.
아오모리를 배경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여기에 와서 결정한 거고...
연인들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오모리를 걷다가 생각한 거라...
어떤 연인들인지는 아직 생각 못 했어.”
“작품 구상차 온 여행인데 그 정도면 작품 구상이 끝난 거 아냐?”
“끝난 거는 아니고 전체적인 스토리가 머릿속에 그려져야 되겠지?”
설의 말에 지민은 가던 길을 멈추고 설을 쳐다봤다. 지민이 멈추자 설도 발걸음을 멈추고 지민을 올려다봤다.
“설아...”
“응?”
“우리 이렇게 가까이에 있고 만나서 얘기도 하고 밥도 먹고 손잡고 거닌 지는 시간으로 새겨야 할 정도로 짧지만, 그 연인들의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면 어떨까? 순간 우리의 이야기이면 좋겠다라고 생각이 드는데... 어때?”
“음... 그러기에는 네 말대로 시간이 너무 짧잖아...”
“그 시간과 추억이 문제라면 지금부터 시간도 만들고 추억도 만들어내자.
그럼 되잖아... 아오모리에서의 연인들의 이야기가 우리 얘기였음 좋겠어.”
“응... 온전히 상상만으로 소설을 써 내려가기에는 내 경험이 부족한 면이 많으니까 소설의 전반적인 구성을 우리들의 모습으로 만들어 내는 것도 괜찮긴 하겠다.”
“그렇지? 그럼 우리 빨리 추억 만들자.”
“너... 그게 목적이었냐?”
“응. 추억을 빨리 만들려면 계속 같이 있어야 되잖아.”
순간 뭔가 낚인 기분이 살짝 들었지만 지민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자 아무렴 어떠냐...
설은 지민과 함께하는 이 모든 순간이 행복했고 지민과 함께 한 지금을 기억하며 다음 소설을 쓰겠다 다짐했다.
해는 어느덧 저물었고 지민과 설은 펜션 앞에 서 있었다.
둘 다 아침부터 서둘러 나온 여행길이라 피곤한 기색 이 역력했다.
그리고 첫 데이트라는 생각에 밤잠을 설친 둘이라 더더욱 피곤함이 몰려왔다.
“어서 들어가서 씻고 푹 쉬어. 잘 자고 내일 또 보자.”
“응. 너도 푹 쉬어.”
지민과 짧게 인사를 하고 설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루 종일 긴장하고 하루 종일 행복해하고 또 하루 종일 심장이 미친 듯 뛴 터라 방 안의 따뜻한 온기를 대하니 극도의 피곤함이 몰려왔다.
지민과의 데이트가 설레고 좋았지만 평소 낯가림이 심한 설에게는 도겸과 연수가 아닌 누군가와 오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지민과의 모든 순간이 꿈처럼 느껴졌다.
평소 작품 구상 차 떠난 여행 동안에는 도겸과 연수에게조차도 연락을 하지 않는 설이지만, 이번 여행만큼 그 두 사람을 까마득하게 잊은 적은 없었다.
도겸과 연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설이 혼자 여행을 만끽하고 푹 쉬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설은 아주 행복하고 바쁜 여행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설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그 속에 몸을 담갔다.
온몸이 스펀지처럼 늘어지고 미친 듯 잠이 쏟아졌지만, 설은 목욕을 끝내고 하얀색 잠옷 드레스 위에 하얀색 긴 카디건을 걸치고 방을 나왔다.
손에는 맥주 두 캔을 들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방을 나왔다.
다른 방에 방해가 될까 살금살금 걸어 펜션의 루프탑 옥상으로 올라갔다.
고즈넉한 펜션과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설은 따뜻한 목욕을 해서 그런지 안 어울릴 법한 루프탑으로 향했다.
루프탑에는 시스템 그늘막이 한밤인데도 불구하고 펴져 있었고 그늘막 밑으로 작은 전구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한겨울과는 어울리지 않는 라탄 소파가 그늘막 밑에 놓여 었있고 뭔가 계절과 맞지 않은 루프탑의 콘셉트를 보고 아무도 오지 않음을 확신한 설은 마음 편하게 들고 있던 맥주 한 캔을 땄다.
몸은 아직도 뜨거운데 몸 안으로 차가운 맥주가 들어가자 “으... 시원하다... “라는 아저씨 단골 멘트가 절로 나왔다.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켜고 설은 루프탑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옥상 벽 난간에 맥주를 잠시 올려두고 핸드폰으로 들을 노래를 찾았다.
Gavin james의 Nervous를 선택해서 노래를 틀었고 꽂고 있던 이어폰 사이로 감미로운 음악이 흘렀다.
『날씨가 추워지면 널 안아주겠다고 약속해... 봄에 우리의 겨울 코트를 잃어버렸을 때 말이야...
이제 넌 다른 사람의 어깨에 기대어 있어... 겨울바람은 내 어깨 위에서 더 차갑지...
널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 거야... 만약 네가 말하지 않으면...』
노래 가사를 생각하며 설은 흥얼거렸다.
감미로운 Gavin james의 노래와 시원한 겨울바람 그리고 더 시원한 맥주 한 모금에 설은 더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지민은 누군가 복도를 살금살금 지나가는 인기척을 느꼈다.
설은 피곤해서 곯아떨어졌을 터였고, 이 펜션에 손님이라고는 자신과 설 뿐이고... 그럼 살금살금 지나가는 인기척은 누구일까 생각했다.
‘펜션 주인인가?’라고 잠시 생각했지만 주인이 왜 자기 집을 굳이 저렇게 극도로 살금살금?
이 생각까지 미치자 지민은 혹시나 살금살금 도둑고양이가 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생각을 하는 틈에 밖에는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아주 고요했으며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다시 방으로 되돌아가던 지민은 이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복도 끝까지 다다르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고 지민은 그 계단을 올라갔다.
지민은 루프탑 문이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간 사람은 설임을 확신했다.
문을 열고 나가니 역시나 설이 옥상 난간 쪽에 몸을 기대어 서 있었다.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고 그녀가 입고 있던 하얀색 잠옷도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지민은 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녀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아마 처음 본 그때처럼 그녀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지막하게 흥얼대는 그녀의 노랫소리며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이며 어느 한 군데도 지민을 설레게 하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이 어두운 곳에서 야릇함을 품어내는 설을 당장에라도 뛰어가 뒤에서 안고 싶었지만, 자칫 그녀가 놀라 쓰러질까 지민은 애써 마음을 억누르며 그녀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nervous?’ 그녀가 흥얼거리는 곡명을 알아채고는 이 또한 반가운 지민이었다.
지민이 하루에 열 번도 더 듣는 노래였다.
‘이렇게 취향이 맞아서야...’
지민은 발소리를 크게 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뒤의 인기척을 느낀 설은 깜짝 놀라 귀에 있던 이어폰을 빼며 뒤를 돌아보았다.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지민이 걸어오고 있었다.
지민인 것을 확인한 설은 가슴을 쓰려 내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저앉은 설을 조심스레 일으키며 지민은 말을 했다.
“미안... 미안... 이 시간에 이 장소에서 안 놀라게 할 수가 없었다고...”
“안 자고 뭐해? 여긴 왜 올라왔어?”
“그러는 너는 한밤중에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뭐허냐.”
“봤어?”
“아니, 느꼈어.”
“뭘 느껴?”
“고양이가 너라고 느꼈어.”
“그래서 따라 올라온 거야?”
“응. 뭐야... 혼자 맥주 마시고 있었어?”
“응. 목욕했더니 좀 더워서...”
“그럼 부르지 그랬냐... 같이 마시게.”
“나는 너 자는 줄 알았지... 부르면 너는 나올 거고... 괜히 나 때문에 잠 깰까 봐.”
“나 생각해서 혼자 멋진 밤을 보내고 있었다?”
“자... 맥주 한 캔 더 가져왔어... 그냥 이거 마시고 입 좀 다물어 줄래?”
“넵.”
지민은 설이 건네준 캔을 따서 시원하게 맥주를 마셨다.
꿀떡꿀떡 지민의 목 안으로 맥주가 넘어갈 때마다 같이 움직이는 지민의 목젖을 보며 설은 자신도 모르게 지민의 꿀떡임에 맞추어 마른 목을 꿀떡꿀떡 삼켰다.
‘인간의 목젖이 저렇게 섹시했었나? 손대어 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설의 얼굴이 또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깜깜한 밤이라 빨간 얼굴이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내 지민을 쳐다보던 눈길을 거두어 아오모리의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이야... 시원하다. 나도 목욕하느라 좀 더웠는데 시원한 맥주를 마시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자신의 옆에 나란히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지민을 쳐다보며 설은 편안함을 느꼈다.
알게 된 지 불과 이틀 만에 이렇게 누군가를 편하게 느끼다니... 스스로의 변화에 대해 적잖이 놀라는 설이었다.
“같이 듣자, nervous.”
“어? nervous 알아? 아니지 유명한 곡이니 알겠지.. 그보다 내가 이 곡 듣고 있는 거는 어떻게 알았어?”
“부르던데?”
“내가?”
“응. 네가.”
“작게 불렀는데 그게 들렸어?”
“안 작았을걸?”
순간 또다시 얼굴이 닳아 올랐지만 또 한 번 지금이 밤인 것에 대해 감사했다.
“나도 그 노래 엄청 좋아해... 요즘은 매일 열 번씩은 듣는 것 같아.”
설이 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지민은 노래에 맞춰 흥얼거렸다.
그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았고 흥얼거리며 맥주를 마시는 지민의 모습은 광고의 한 장면 같았다.
‘내가 이런 사람과 만나고 있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나 착하게 살았나 봐.’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지막하게 설은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설아.”
“응?”
“너는 이제부터 내 어깨에만 기대... 앞으로 내 어깨는 너에게만 내어줄게.”
“응.”
“그리고...”
“그리고?”
“아... 아니다... 다음에...”
“뭐야... 왜 말을 하려다가 말아... 다음에는 또 뭐야...”
“다음에는 이런 옷차림으로 밤에 몰래 여기에 오지 말라고. 진짜 납치되겠다. 너무 야하다고...”
“야해? 내가?”
“응.”
머뭇거리며 대답하는 지민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몹시도 당황하였고, 그런 모습의 지민이 귀여워 설은 말을 이어갔다.
“너한테만 야한 거 아냐?”
“그건 아닐걸?”
“그럼 질문을 바꾸지... 그 납치범이 너 아냐?”
“그건 맞을걸?”
지민의 솔직한 대답에 만족스러운 설은 까르르 웃었다.
설의 귀여운 웃음소리에 또 한 번 심장이 떨리고 설을 안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설은 계속 지민 앞에서 행복하게 웃었다.
지민은 더 이상은 곤란하다 생각하고 남아있는 맥주를 다 마시고는 설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가워졌어.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그만 내려가자.”
“응. “
설은 지민의 따뜻한 손을 잡고 옥상에서 내려왔다.
슬슬 잠이 쏟아진 설은 포근한 이불 속에 들어가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그런 설과는 다르게 지민은 루프탑에서의 매혹적인 설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밤새 잠을 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