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연인이 된 지 여섯째 날
조금 늦게 잠에서 깬 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씻고 있을까 생각이 들어 욕실 문 앞에 귀를 갖다 댔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부터 말도 없이 어디 간 걸까 생각하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정원에서 허리를 굽히고 뭔가를 만들고 있는 지민의 뒷모습이 보였다.
설은 옷장 안의 하얀색 카디건을 꺼내어 어깨에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지민은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큰 눈사람과 조금 작은 눈사람을 열심히 만드느라 지민은 옆에 설이 다가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침부터 뭐하나 했더니... 이거 만들고 있었던 거야?”
설의 말소리에 지민이 뒤돌아보았다.
“깼어?”
“뭐하냐.. 너...”
“뭐하긴... 눈사람 만들고 있었지~”
“재밌냐?”
“응!”
순진한 지민의 모습에 설이 ‘쿡’하고 웃었다.
다 큰 성인이 거기다 많은 여성들의 워너비인 배우가 정원에 쪼그려 앉아 눈사람을 만들고 행복해하는 모습이라니...
다들 상상도 못 하는 지민의 모습을 혼자 독점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에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뭔가 지민을 독점하고 있다는 생각에 우쭐해졌다.
“설아... 이거 봐봐... 여기 큰 거는 나고, 옆에 조금 작은 건 설이 너야.”
“내가 꼭 작아야 돼?”
“응? 네가 나보다 작잖아.”
“그렇다고 눈사람도 너는 큰 거... 나는 작은 거... 해야 하냐고.”
“아... 그래? 그럼 네가 큰 거 할래?”
“응.”
“그래... 그럼 여기 큰 게 우리 설이고, 작은 게 나... 어때 마음에 들어?”
꼭 칭찬해 달라는 아이 같은 표정을 하고서 설을 쳐다보는 지민을 보고 설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지민이 대체 뭐가 웃기냐고 물어댔지만 설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까르르 웃었다.
“설아.. 눈도 그쳤는데 오늘은 밖에 나가볼까? 또 온 동네가 하얗게 변했을 거야...
첫 발자국 남기러 나가자. 어때?”
“응... 그러자.”
지민과 설은 손을 나란히 잡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는 펜션 주인이 간단한 아침을 놓아두었다.
둘은 펜션 주인이 마련해준 토스트와 스크램블을 가볍게 먹고 난 후 밖에 나갈 준비를 했다.
둘 다 회색 후드티와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그 위에 두툼한 패딩점퍼를 걸쳤다.
그리고 부츠를 신고 펜션 밖으로 나갔다.
며칠간 내린 눈으로 온 동네가 하얗게 변해있었고 사람들의 발자국은 다행히도 많이 없었다.
둘은 새하얀 동네를 한 발짝씩 밟으며 들려오는 눈 밟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뽀드득뽀드득’
“설아...”
“응?”
“너 지금 기분 좋지.”
“완전 째져.”
“째져?”
“응!”
“거참 작가라고 표현 봐라... 참으로 저렴하다.”
“원래 솔직할수록 저렴하고 말초적으로 들리기도 하는 거야...
문장이 그렇고 문학이 그렇고 가끔은 우리 삶이 그런 거지.”
“뭔 소린지는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엄청 그럴듯한데?”
“꾸밀수록 거추장스럽고 세련돼 보이려 할수록 우스워지는 거야... 글이 그래...”
“글이?”
“응. 솔직하지 않은 글은 어디서도 티가 나더라고...
특히나 이쁘고 싶어서 꾸미면 더더욱 와닿지가 않고 부자연스러워지더라고...”
“그래?”
“응. 그래서 솔직하고 담백하면서 차라리 말초적인 문장이 나은 데... 그런 문장을 쓰려면 내가 솔직한 사람이... 꾸밈없는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더라고...”
“그래서 네가 쓴 글은 그렇게 솔직하고 누구나 다 공감할 수가 있구나... ‘그녀는 진심이었다’처럼...”
“응. 그래서 제목도 진심이었다 야...”
“그래서 그런가... 삶에서도 참으로 솔직해 너는... 인터뷰만 봐도 알아... 한마디도 꾸며서 하는 법이 없어요... 그냥 떠오른 생각 그대로 필터 없이 다 말을 하더라고.”
눈을 밟던 설이 걸음을 멈추고 지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지민은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설을 쳐다보았다.
“너... 안티팬이었냐?”
“응?”
“아님 나 먹이는 거냐?”
“응?”
“내 칭찬인 줄 알고 듣고 있었더니... 가만 보니.. 까고 있잖아!”
“아냐 아냐 설아~ 큭큭큭... 나도 솔직하게 말한 거야..”
“그게 솔직한 거냐... 까는 거지!”
설이 눈을 두 손으로 모아 단단하게 만들어 지민에게 던졌다.
“설아~ 잘못했어~ 앗! 차거... 살려줘~”
“한 번에 덤벼라... 시간 없다.”
“안 덤빈다고~”
지민은 도망을 가고 설은 지민을 쫓아가고 그렇게 둘은 동네를 신나게 뛰어다녔다.
어느새 큰 길가까지 나온 둘은 예전에 들렀던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를 주문하고 서로를 마주 보며 테이블에 앉았다.
설은 여전히 삐친 표정으로 창 밖을 보고 있었고 그런 설의 뾰로통한 표정이 너무 귀여워 지민은 핸드폰을 꺼내어 설을 찍었다.
“너..뭐허냐...”
“아니... 큭큭... 툭 튀어나온 입이 너무 귀여워서...”
“오늘 자꾸 매를 번다... 그지?”
“아.. 설아 커피 나왔다... 카페인... 카페인 충전하고 조금 릴랙스 하자..”
카페 주인이 커피 두 잔을 테이블 위에 놓아주었다.
따뜻한 커피를 조금 마신 후 설이 말했다.
“그런데... 너... 이렇게 계속 여기 있어도 돼? 어제 보니까 시나리오 열심히 보던데...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하는 거 아냐?”
커피를 마시던 지민이 진지한 표정으로 설을 쳐다보았다.
“설아... 너는 언제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나는... 아직... 처음부터 보름은 생각하고 온 터라... 아직 더 있어도 돼.”
“나랑 같이 들어가지 않을래?”
“응?”
“나는 일단 내 촬영분은 회사에 얘기해서 최대한 뒤로 빼둔 상태이긴 한데...
아무래도 여배우와 같이 하는 신은 더 이상은 미루기가 힘든 모양이긴 하더라고...
그렇다고 여기에 너 혼자 두고 가기도 싫은데...”
“같이 들어가도 너는 바로 촬영장으로 가야 하고... 나는 내 작업실로 갈 텐데... 같이 들어가는 게 의미가 있어?”
“그렇긴 하지... 그래서 마음 놓고 너한테 떼쓰지도 못하고 있어...
그렇다고 내 맘이 널 여기 혼자 두고 가는 게 너무 불편해서 말이야...”
“하긴 여기 와서 거의 너랑 같이 있었으니...
혼자 여행 왔는데 혼자 있었던 적이 그러고 보니 없었던 거 같긴 하네...
나는 있잖아... 지민아... 혼자 좀 있고 싶다 생각하다가도 막상 너 먼저 가고 나면 여기가 엄청 쓸쓸하게 느껴질 것 같기도 해... 어떡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어...”
“나도 그래... 어쩌면 좋을까?
같이 들어가도 함께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너 혼자 여기 두고 가는 건 더더욱 맘이 안 놓이고...”
“바로 결정해야 돼?”
“아냐.. 그런 건... 아직 며칠 시간은 더 있어.”
“그럼 천천히 같이 고민해 보고... 지금은 우리 그냥 이 시간에 충실하면 안 될까?
네가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니까 우울해져...”
“그래.. 이 얘기는 그만 하자... 근데 설아... 이 얘기 네가 먼저 했다?”
“응? 그랬나?”
“응. 그랬어... 은근 기억력이 안 좋다는 말 많이 듣지?”
“너 오늘 그게 콘셉트 맞지?”
“무슨 콘셉트?”
“깝죽거리다가 매 버는 콘셉트.”
“어혀! 낭군님한테 깝죽이라니요!”
“덜 맞았다, 그지?”
“잘못했어... 우리 토스트라도 먹을까?”
“아침에 토스트 먹은 거 기억 안 나? 먹은 지 두 시간도 안 됐는데?”
“하하하... 그렇네...”
“너도 은근 기억력 별로라는 말 많이 듣지?”
“..."
“신기하네... 그런데 배우란 말이지... 대사는 어떻게 외울까...”
지민은 패배를 인정하며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쓸데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카페에서 나누며 둘은 연신 웃어댔다.
이런 모습이 앞으로는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앞으로도 영원할 것 같은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아 우리 거기 가볼래?”
“어디?”
“장어 덮밥집... 그 집 이름이 뭐더라...”
“우나산?”
“맞다. 맞다. 우나산.”
“왜 장어 먹고 싶어? 뭐... 힘...이라도 쓸 거야?”
“얘 봐라 얘 봐라... 무슨 상상을 하는 거냐 지금...”
“흠흠... 됐고...”
“뭐... 기대했나 보네...”
“됐다니까.”
“맨날 자기가 불리하면 됐다더라...”
“돼....꼬... 거긴 왜.”
큭큭거리던 지민이 말을 이어갔다.
“생각해보니 여기 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가고 이제 이 동네는 그냥 여행지가 아니라 너와 나의 추억의 장소로 되어있어.. 우나산도 그런 추억의 장소 중 하나야.. 그때는 남남처럼 따로였지만... 연인이 되어 그 집에 가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서... 아침에 토스트만 먹어서 그런가 조금씩 배도 고파오고... “
“그럴까? 한 번 먹고 말기에는 맛있기는 했어. 오늘 점심은 거기 가서 먹자.”
“그러자...”
“그런데.. 너... 오늘따라... 추억 얘기가 많다?”
“내가 그랬나?”
“뭐... 한국 가는 거 얘기도 하고 그러다가 추억의 장소니 뭐니.. 그러고... 너 좀 이상하다?”
“이상하긴... 한국 가는 거야 너도 나도 다 알고 있는 거고... 우나산은 동네에 나오니 갑자기 생각나서 말한 거지.”
“그런가?”
“응. 그래.”
“왠지 불안한데?”
“뭐가 불안해... 이렇게 내가 너 옆에 있는데...”
지민은 설의 손을 꼭 잡았다.
지민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거렸다.
반지를 보는 순간 지민을 처음 봤을 때가 생각이 났다.
유독 길고 하얀 손가락이 이뻐 보였고 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거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지민아...”
“응?”
“전부터 궁금했는데...”
“응.”
“이 반지 뭐야?”
“아... 이거?”
“응... 남자들은 새끼손가락에 반지 잘 안 끼잖아..”
“이거 어머니가 준거야... 어릴 적에...”
“엄마가?”
“응... 어렸을 때 생일선물로 주셨는데... 내가 어릴 때부터 액세서리를 좋아했거든...
그때는 두 번째 손가락에 꼈었는데 점점 크면서 손가락이 굵어지다 보니.. 이제는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는 거야.. 더는 안 클 거니까 계속 이 새끼손가락에 낄 수 있겠지?”
“그런 반지였구나... 난 또...”
“왜? 무슨 상상했는데?”
“아니... 첨에는 뭐 커플반지인가 했지...”
“아니 커플반지를 새끼손가락에 끼는 사람도 있나?”
“너는 연예인이니까... 아니 배우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지...”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맞네... 그래서 포기했어?”
“뭐래...”
“솔직하게 말해봐...”
“뭘 솔직하게 말해~”
“아까 뭐라 뭐라 했잖아... 진심을 담은 글을 쓰기 위해서 평소에도 솔직하게 산다고... 뭐 그래 말하지 않았나?”
“..."
“지금은 하나도 안 솔직한데? 작가로서 빈 말이었냐?”
“여기서 작가가 왜 나오냣!”
“그러니 말해보라고... 포기했냐고!”
“그래 포기했다.. 어쩔래.”
“무슨 여자가 포기가 그래 쉽냐... 긴지 아닌지 찔러나 봤어야 하는 거 아니냐!”
“네가 무 냐... 당근이냐.. 찔러나 보게.”
“그럼 안 찔러보고 뭐하게.”
“찌를 거면.. 내가 가져야지... 물건 그렇게 흠집 내고 나 몰라라 하는 거 아니다... 그건 상도덕에 어긋나는 것이야!”
“오~~~ 그래서 가졌냐?”
“큭큭... 그래 가졌다... 어쩔래...”
“좋냐...”
“좋다...”
“얼마나...”
“욕 나올 정도로.”
둘은 행복해하며 웃었고... 슬슬 배가 고프다며 카페에서 일어났다.
“우와! 이 집 더 맛있어졌어!”
장어 덮밥 한 술을 크게 떠먹던 설이 소리쳤다. 그런 설을 보며 큭큭 웃던 지민이 말했다.
“그건... 나랑 같이 먹어서 그런 거 아닐까 싶네. 나는...”
“에?”
“에? 는 뭐냐... 아니라는 거냐?”
“너.. 이렇게 느끼한 말도 할 줄 알아? 놀라운데?”
“느끼하다니... 난 사실을 솔직하게 말한 거구만...”
“우와... 저 눈도 하나 안 깜빡거리고 말하는 거 봐.. 표정은 어쭈... 진짜 진지한데? 누가 배우 아니랄까 봐... 여기서 개인기를 쓰냐!”
“사실을 말한 거라니까.. 그리고 난 연기도 진심을 담아서 한다고.”
“네네... 진심 어린 연기는 촬영장에서 실컷 하시고요... 여기서는 그 느끼함 걷어줄래요? 안 그래도 느끼한 장어 덮밥이 한층 더 기름지네요.”
“일분 전에는 더 맛있어졌다며... 영 솔직하지 못한데?”
“우와! 맛있다!”
“뭐하냐.. 진짜...”
설의 앞뒤 안 맞는 행동에 지민은 웃느라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하고 그런 지민의 모습이 웃겨 설은 덮밥을 엎을뻔했다. 그런 둘의 모습이 예뻐 가게 주인은 한참을 둘을 바라보았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실컷 눈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만 펜션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둘은 펜션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펜션으로 돌아와 간단히 씻은 다음 설은 다시 노트북을 켰다.
“안 쉬어?”
“여태 쉬었잖아.”
“다시 쓰는 거야?”
“응.”
“뭐가 그렇게 급해...”
“빨리 우리 얘기 쓰고 싶어...”
“왜 빨리 다 쓰고 싶어?”
“너에게 선물로 줄려고...”
“나한테?”
“응... 우리 얘기니까...”
“나도 지분이 있는 거네?”
“그럼 반은 있지...”
“그럼 인세도 나눠 줄 거야?”
설은 지민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너 이렇게 계산이 빠른 아이였냐?”
“계산이 빠른 게 아니라 제 몫을 정확히 판단하는 어른이라고 해줄래?”
“그거나 그거나...”
“큭큭... 알았으니까 얼른 써... 나는 방해 안되게 옆에서 시나리오 읽을게...”
“응.”
“나 먼저 잠들 수도 있다~”
“응... 괜찮아... 나도 오늘은 조금만 쓰고 일찍 잘 거야... 그런데.. 지민아...”
“응?”
“너... 니 방으로는 안 가냐? 그러고 보니 계속 여기 있네.”
“왜 싫어?”
“아니 그냥 궁금해서...”
“방 뺏어.”
깜짝 놀라 설이 지민을 쳐다봤다.
“방을 빼?”
“응... 계속 같이 있는데 굳이 방 두 개를 쓸 이유가 없잖아... 돈도 아낄 겸...”
“그럼 내 방을 빼야지 왜 니 방을 빼냐? 상의도 없이.”
“나... 졸려... 잘래...”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지민은 갑자기 코 고는 소리를 냈다.
“갑자기? 코까지?”
그런 지민이 어이없이 귀여워 씩 웃고는 설은 글쓰기에 집중했다.
밖은 조용히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