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연인이 된 지 일주일이 되는 날_우리 이렇게 마지막은 아니지?
새벽부터 지민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계속 울려댔다.
알람 소리인가 해서 지민은 핸드폰을 껐다.
설이 새벽에 잠든 터라 행여나 핸드폰 소리에 잠에서 깰까 지민은 전원을 끄려던 참이었다.
‘띵똥’, ‘띵똥’
연신 문자가 울려댔고, 문자 소리에 그전에 울린 건 알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문자를 확인한 지민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지민아... 너 아직 아오모리냐? 설마 한 작가와 같이 있는 거야? 문자 보면 전화해.. 큰일 났어... 빨리!」
매니저 송 과장의 문자였다.
지민은 조용히 방에서 나와 송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나 며칠만 더 있다가 한국 간다고 했잖아요... 새벽부터 무슨 일이에요?”
“지민아... 놀라지 말고 침착하게 들어...
나 지금 공항이야... 조금 있으면 비행기 타...
내가 아오모리에 도착할 때까지 너는 펜션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서는 안돼... 한 작가도 마찬가지고, 알았지?”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그것보다 내가 한 작가와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지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아냐고? 온 국민이 다 알아! 너랑 한 작가랑 지금 아오모리에 같이 있는 거 온 국민이 다 안다고!”
지민이 너무 놀라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게...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형?”
“너 한 작가랑 거기서 스키 타러 갔었냐? 스키 타러 가서 눈밭에서 둘이 굴렀냐?”
“예? 그걸 어떻게...”
“그거 사진 다 찍혔어 인마~ 조심했어야지~ 주위에 사람들 경계도 안 했어?”
“아니.. 그게 그날 거기 사람들이 별로 없...”
그 순간 지민은 설과 눈밭에 앉아 있을 때 자신들을 쳐다보며 내려가던 스키어들이 떠올랐다.
‘설마.. 그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본 거야?’
“그래.. 이제 뭐라도 생각이 나는 모양이네?”
“그래서요? 그래서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건대요?”
“그거 인스타에 올려서 조회수가 백만이 넘어! 연예 톱뉴스에 나오고 난리도 아냐... 한 설과 서지민의 러브스토리라고!! 눈밭에서 왜 구르냐. 구르는 사진도 다 올라왔어!!! 뭐 우동인가? 라면인가? 그것도 같이 먹었다며!”
지민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제부터 이유도 없이 가라앉는 알 수 없던 기분이 왜 그랬는지 점점 이해가 되고 있었다.
“어... 떡 해요?”
“지금 소속사로도 전화가 빗발치고 기자들이 쫙 깔려있어...
우리는 사실무근이다라고 계속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지금 당장 서지민이 어디 있는지 모습을 보이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지금 공항에 있는 거고... 그러니까 지민아.. 너는 그냥 펜션에 그대로 있어... 절대 나가면 안 돼... 기자들이 지금 아오모리로 떠났어... 현장 포착이라나.. 뭐라나.. 그러게 이 자식아.. 나한테 귀띔이라도 했었어야지...”
지민은 더 이상 송 과장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설이 걱정이 되었다. 자신은 직업의 특성상 대중 앞에 나설 수밖에 없지만 설은 아니었다.
아무리 인기 있는 작가라고는 하지만 한 번도 사생활이 공개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귀에 전화기를 가까이 댔다.
“알았어요.. 형... 일단 여기 가만히 있을게요.”
“그래... 내 전화 말고는 누구 전화도 받지 말고.. 오전 중에 도착할 거야.”
“네.”
통화를 끝내고 지민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설은 간 밤에 늦게까지 글을 쓰고 잠이 든 터라 세상 고요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 설의 옆에 앉아 잠들어있는 설의 얼굴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설아... 우리 어떡하냐... 우리 이제 못 보면 나 어떻게 사냐...
설아 너는 나 없이 살 수 있어? 설아... 우리 그냥 도망갈까...’
지민의 눈가가 빨개지더니 이내 눈물이 고였다.
그때 설이 나쁜 꿈이라도 꾸는지 끄응 소리를 냈고 그런 설을 지민은 살포시 안아주며 설의 옆자리에 누웠다. 한 시간쯤 지나서 설이 슬슬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자신을 꼭 껴안고 있는 지민이 보였다.
“언제 일어났어? 몇 시야?”
“일어났어? 아직 좀 더 자도 돼... 7시야.”
“너는 언제 일어났어? 목소리가 한참 전에 일어난 것 같은데?”
“응. 좀 일찍 일어났어.”
“왜?”
“너 보고 싶어서...”
“뭐야... 아침부터... 일어났으면 나 깨우지 그랬어.”
“그냥 너 자는 거 구경했어... 하도 곤하게 자길래 깨우기도 싫었고...”
설은 지민의 사랑을 느끼며 지민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고 지민은 설의 작고 가느다란 몸을 꼭 껴안아 주었다.
“설아... 배고프지 않아? 토스트랑 커피 줄까?”
“응. 커피 마시고 싶어.”
“잠시만 기다려...”
지민은 방에서 나가 펜션 주인에게 커피와 토스트를 부탁했다.
그리고 조만간 주위가 시끄러워질 수도 있다고 펜션 주인에게 넌지시 말을 했고 펜션 주인은 펜션의 문을 닫을 테니...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할 테니 걱정 말라며 지민의 어깨를 다독여 줬다.
지민은 펜션 주인이 마련해준 커피와 토스트를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설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세수를 한 말간 얼굴로 지민을 쳐다보았다.
방 안에 커피 향이 진하게 퍼졌고 커피 향에 설의 표정은 한껏 편안해졌다.
“커피 향 너무 좋다.”
“네가 좋아하는 과테말라야... 주인한테 특별히 부탁했어.”
“진짜? 고마워.”
설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고 지민은 토스트에 딸기잼을 발라 설에게 건넸다.
설은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며 지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평소에도 감정의 기복 없이 편안한 상태의 지민이지만 오늘따라 유독 지민은 차분해 보였다.
“지민아...”
토스트를 씹으며 설이 말했다.
“너 오늘 좀 달라 보인다.”
“뭐가?”
“그냥... 너무 차분한데... 아침이라 그런가?”
“아침이라 그럴 걸? 얼른 토스트 먹어... 다 식겠다.”
“응.”
설은 지민이 앞으로 무슨 말을 할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토스트를 먹으며 지민을 쳐다봤고, 설의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을 잊지 않으려는 듯 지민은 설을 사랑스럽게 쳐다봤다.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설이 말했다.
“자... 이제 말해봐.”
“응?”
“나 토스트 다 먹었고 커피는 반이나 마셨어... 그러니 말해보라고...”
“무슨 말...”
“너 나 다 먹을 동안 기다렸잖아... 다 먹었으니까 말해보라고...”
“하여간 눈치 하나는...”
“뭐야... 진짜 할 말이 있었던 거야? 그냥 찍은 건데?”
그 순간 지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분위기가 달라진 지민을 느끼며 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설아... 놀라지 말고... 내 말 차분하게 들어...”
“뭔데 그래... 괜히 무섭게...”
“지금... 우리... 사람들이 다 안대.”
“뭘?”
“너랑 나 여기 같이 있는 거...”
설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웃음이 사라졌다.
잘 자고 일어나 이게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민의 진지한 얼굴에 상황의 심각함을 느끼며 지민에게 말했다.
“어... 떻게 안대?”
“우리... 스키 탄 거 누가 사진을 찍었나 봐... 그걸 인스타에 올려서... 사람들이 많이 본 모양이야...”
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럼.. 어떡해?”
“설아... 일단 김 대표한테 전화해 봐... 너 전화기 어디 있지?”
지민은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설이 자신의 가방을 가리켰다.
“너 폰 껐었어?”
“응. 작품 구상하러 오면 끄기는 하는데... 너랑 같이 있으니 더더욱 폰 볼 일이 없어서...”
“아... 그랬구나... 그럼 김 대표도 걱정 많이 하고 있겠다... 얼른 전화해봐.”
“응... 알았어...”
설은 핸드폰을 전원을 켰고.. 전원이 켜지자 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부재중 전화 37통.’
김 대표와 연수의 부재중 전화가 37통이나 밤새 와 있었다.
설은 김 대표의 번호를 눌렀다..
설의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고 그런 설의 어깨를 지민이 감싸주었다.
“야!!! 한 설!!! 너 진짜 나 죽는 거 보고 싶냐!!!”
“도겸아...”
“너! 너! 진짜야? 서지민이랑 여태 거기 같이 있었던 게 맞아? 아니지? 저거.. 저 사진 너 아니지?”
“...”
“설아! 뭐라고 얘기를 해봐... 여기 지금 난리 났어! 작업실 앞에도 기자들이 진 치고 있다고~ 너 어디 갔냐고!!!”
“도겸아... 그게...”
“네가 왜 서지민이랑 러브스토리를 찍고 있냐고!!! 야... 한 설!!!”
도겸이가 소리를 지르는 통에 설은 어깨까지 파르르 떨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설을 다독이며 지민은 설의 전화기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김 대표님...”
“당신! 당신 누구야! 누군데 설이 전화를 받아!”
“저 서지민입니다...”
“...”
“김 대표님?”
“당신이 왜 거기 있어!!!! 이게 다 사실이야?? 당신 우리 설이를 어떻게 한 거야!”
“지금 설이와 저는 아오모리에 같이 있는 게 맞습니다.”
“뭐? 뭐? 설이? 당신이 먼데 한 작가 이름을 마음대로 불러!”
“대표님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고... 이리로 좀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 당신이 뭔데 나보고 오라 마라야!!! 설이 바꿔!”
“지금 설이가 많이 놀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 말씀하시고... 그보다 대표님도 빨리 아오모리로 오셔야겠습니다.”
“하... 진짜.. 마음에 안 드네... 설이가 니 꺼라도 되냐!”
“설이 제 꺼 맞습니다. 설이 안전 또한 제가 책임지고 싶지만 지금은 저 때문에 설이가 더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서 대표님이 설의 안전을 좀 맡으셔야 할 것 같네요.”
“설이 바꿔... 당장!”
지민은 설에게 전화기를 넘겨주었고, 조금 진정이 된 설은 전화기를 받았다.
“도겸아...”
“설아... 괜찮아? 지금 저 자식이 한 말 다 사실이야?”
“응”
“...”
“도겸아...”
“알았어... 얘기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일단 내가 그리로 갈게...
내가 가서 널 데려와야겠어...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생각보다 더 심각해...
어쩌면 기자들이 그리로 갔을지도 모르겠네... 설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응.”
“내가 지금 공항으로 가서 아오모리로 바로 갈게... 그 펜션 이름 나한테 문자로 보내줘... 그리고 너는 내가 갈 때까지 밖에 나가지 말고. 전화기 끄지 말고... 내 전화 말고는 절대 받지 말고... 그리고 서지민 소속사에도 내가 좀 알아볼 테니까.. 어떻게 대처할 건지 입도 맞춰야 하고... 너는 일단 진정하고 절대 밖에 나가서는 안 돼... 아! 그리고 인터넷도 하지 마... TV도 보지 말고... 알았지? 절대 보면 안 돼!”
“응.”
“그래... 설아... 가서 보자.”
설은 전화를 끊고 지민을 쳐다봤다.
지민의 눈가가 빨갛게 변해있었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울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설은 지민을 향해 애써 웃음 지었다. 설의 웃음에 지민은 그만 울어버렸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내려와 방바닥에까지 뚝뚝 떨어졌다. 그런 지민의 어깨를 다독이며 설이 말했다.
“우리 지민이...애기였네... 나도 안 우는데 왜 네가 우냐?”
“나... 나 때문에 너까지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서... 그 스키장.. 거기도 내가 가자고 한 거고... 아니다.. 너 꼬신 게 나잖아... ”
“그래서... 후회해?”
“아니... ”
“그럼 됐어... 된 거잖아...”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지민아...”
“응?”
“나 커피 다 식었어... 다시 가져다주면 안 될까?”
“응... 잠시만 기다려.”
지민이 커피를 가지러 잠시 방에서 나간 사이 설은 인터넷을 확인했다.
실시간 검색어에 온통 한 설, 서지민, 아오모리, 러브스토리 등등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기사에는 연신 둘의 러브스토리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고 둘이 핫코다산에서 눈밭에 누워있는 사진, 온몸에 눈을 묻히고 구르는 사진. 그리고 산장에서 우동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댓글에는 잘 어울린다는 글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설을 저격한 글이 많았다.
지민의 팬들이 설을 가만두지 않았다. 아마 도겸이가 절대 인터넷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것도 설이 지민의 팬들로 난도질될 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댓글을 읽던 설은 차마 더 이상 읽지 못하고 폰을 내려놓았다. 이내 눈시울이 빨개졌다.
‘내가 지민을 꼬이려고 캐스팅을 했다니... 이건 너무하잖아... 나는 캐스팅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고... 오징어 같은 것들이 부러우니까.. 이 씨...’
거기다 설이 지민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것도 문제가 되었다.
이 또한 설이가 지민을 꼬여냈다는 미끼로 쓰기에 충분한 부분이었다.
지민이 커피를 들고 방으로 돌아와 눈시울이 빨개진 설을 보았다.
“설아 왜 그래?”
설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너 혹시 기사랑 댓글 봤어?”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은 게 뭐... 네가 나 꼬였지... 내가 꼬였나? 이 씨 오징어 같은 것들이 부러우니까.. 씨.”
큭큭... 투덜대는 설을 보고 지민은 그만 웃음이 터졌다.
“웃기냐... 너는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냐!”
“그러니까 너는 지금 내가 꼬인 건데 억울하다는 거잖아... 이 심각한 상황에 너는 그게 제일 화나는 거잖아...”
지민은 더 크게 웃었다.
“그럼! 포인트가 그거잖아! 이런 댓글 다는 게 전부 너 팬일 거고 지들이 너 못 가지니까 샘나서 나를 마녀 취급하는 거잖아.. 또 내가 이쁘니까 질투도 나니까.. 오징어들이... 어?”
“설아.. 넌 정말... 하하하... 진짜 넌 최고야...”
“뭐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뭐 이런? 이런 상황에서도 당당한 네가 너무 좋아.”
“그럼 내가 안 당당할 게 뭐 있어? 우리가 무슨 불륜을 저질렀어. 누구 등쳐먹길 했어... 선남선녀가 서로 사랑에 빠지는 게 세상 이치고 우리는 세상 이치대로 잘 살고 있는 건데 내가 왜! 단지.. 직업이 좀 거시기해서... 그런 거지.”
설의 말에 지민은 설을 꼭 껴안아주었다.
“다행이다.”
“뭐가.”
“네가 이렇게 괜찮아서 멋진 여자라서 다행이라고.”
“그걸 이제 아셨어?”
“너무 놀라거나 무서워하거나 혹시나 나를 원망할까 봐 겁이 났거든.”
“내가 왜 너를 원망해.”
“내가 너한테 연애하자고 막 졸랐잖아.”
“뭐... 조른다고 내가 다 들어주나? 나도 너 보고 한눈에 반했잖아... 네가 졸라서 되려 좋았는 걸 뭐...”
“그럼 나 만난 거 후회하는 거 아니지?”
“후회를 왜 해... 나는 너무 좋아...”
“그럼 설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지민은 설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은 후 천천히 말을 했다.
“먼저 젤 중요한 부분부터 말할게... 우리는 변하지 않아. 바뀌는 거 아무것도 없어. 나는 너를 놓지 않을 거야... 언제까지고 너 옆에서 너를 지키며 사랑할 거야.”
“응. 알아.”
“그렇지만 지금 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상황이 좀 심각한 것 같아... 김 대표 지금 여기로 온대지?”
“응.”
“일단 지금은 김 대표를 따라가... 지금은 김 대표가 너를 지켜줄 거야.”
“왜?”
“지금은 우리 같이 나가면 안 돼... 나 때문에 네가 더 다쳐... 그렇게 둘 수는 없어... 일단 김 대표가 올 때까지 여기 있다가 오면 같이 가... 김 대표 너무 너 옆에만 있어서 맘에 안 들었는데... 지금은 김 대표가 있어서 다행이다 싶어.”
“그럼 너는?”
“나는 지금 매니저 형이 여기로 오고 있어. 일단 매니저 형이 오면 몰래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촬영은?”
“촬영장에도 기자들이 쫙 깔려서 한동안 촬영은 힘들 것 같아.
일단 소속사로 돌아가서 어떻게 대처할 건지 의논을 해야 할 것 같아...
아마 그 자리에는 김 대표도 참석할 거야... 어떻게 해야 할지 같이 고민해야 하니까.”
“응.”
“일이 이렇게 되어버려서 미안해, 설아...”
“네가 왜 미안해...”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무슨 말이야, 그게... 나는 너 믿어.”
“설아 손 줘봐.”
“손?”
“응.”
설은 왼손을 지민에게 내어주었고 지민은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설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반지는 거짓말처럼 설의 손가락에 꼭 들어맞았다.
“반지는 왜?”
“지금 당장 줄게 이것뿐이야... 다음에 우리 진짜 이쁜 커플링 맞추자.”
“이거 너한테 소중한 반지잖아.”
“그러니까 나중에 커플링 할 때까지 네가 가지고 있어...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한테 소중한 반지를 맡기는 거야.”
“응. 고마워... 그런데 나는 지금 너한테 줄 게 없는데, 어쩌지?”
“나? 벌써 받았는데? 주웠다고 해야 되나?”
“응?”
지민은 가방에서 스카프를 꺼냈다.
“어? 내 스카프다.”
“내 거야... 네가 버렸다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때부터 줄곧 가지고 있었어. 네가 찾으면 돌려주려고 했는데, 이건 내가 가질게...
잘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나중에 다시 만나서 돌려줄게.”
지민의 말에 설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지민과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설은 한없이 슬퍼졌다.
“설아 왜 그래... 우리 다시 볼 거야... 안 좋은 생각 하지 마.”
설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지민의 눈가도 다시 빨개졌다.
“설아.. 나는 너를 놓지 않을 거야...
만약 내 미래와 너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무조건 너를 선택할 거야...
내 남은 인생을 너한테 걸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시 너한테 달려올 거야...
설아 약속할 게... 그러니 울지 마.. 나 믿지? 나 기다릴 거지?”
지민의 말에 설의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그렇게 한참을 더 울었다.
그러고 난 후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을 양손 바닥으로 씩씩하게 쓱 닦아낸 후 말을 했다.
“응. 믿어... 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기다릴 거야.”
지민은 설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설아.”
“응. 말해.”
“너 소설... 완성해줘... 우리 얘기 꼭 끝까지 써줘...”
“응. 약속할 게...”
그때 지민의 핸드폰이 울렸다. 매니저 송 과장의 전화였다.
지민은 눈가를 닦고 난 후 전화를 받았다.
“어. 형... 응... 벌써? 아... 뒷문... 응.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려.”
지민이 전화를 끊었고 설을 쳐다보았다.
설의 동그란 눈이 한층 더 크게 보였다.
“설아...”
“응. 괜찮아... 말해.”
“지금 매니저 형이 밖에 와 있대. 그런데 지금 펜션 앞에도 기자들이 쫙 깔려 있대... 형이 있으면 결국 내가 여기 있다는 거니까... 뒷문으로 나오래...”
“응... 가... 먼저 가... 도겸이 곧 올 거야... 어차피 우리 둘이 같이 나갈 수는 없으니까...”
지민은 설의 손을 잡았다.
설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쓸며 말했다.
“설아... 한동안 연락 못 할지도 몰라.”
“알아...”
“설아.”
“응.”
“우리 약속하나 할까?”
말간 얼굴로 설은 지민을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약속?”
“내년 이맘때 또 아오모리에 지금처럼 눈이 많이 오면... 눈이 엄청 많이 와서 거리에 사람들도 여행객도 없어지면 우리 여기서 또 만날까?”
“내년에 눈이 안 오면?”
“그럼 후 내년에... 언제든... 지금처럼 눈이 엄청 내리면 우리가 약속한 그날이다 생각하고... 여기서 우리 다시 만날까?”
“그 전에는 우리 못 보는 거야?”
“어쩌면...”
“어쩌면...”
“그러니 우리만의 약속을 하는 거야... 어때?”
“응. 좋아.”
“약속이 언제라고?”
“지금처럼 아오모리에 눈이 엄청 많이 오면 우리가 약속한 그날이다... 맞지?”
“응.”
지민과 설의 눈이 다시 붉어졌고 지민은 설의 가슴이 으스러지도록 그녀를 꽉 껴안았고 설은 다시 펑펑 울기 시작했다. 지민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지만 지민은 설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지민의 전화기가 다시 울렸다.
지민은 설을 보며 말했다.
“이제 가야 할 것 같아.”
“응. 가.”
“울지 마... 설아... 울려서 미안해...”
“안 울게... 네가 안 미안해지도록 이제부터 안 울게.”
설은 씩씩하게 눈물을 닦아냈다.
“그럼 먼저 간다.”
“응. 먼저 가.”
“나중에 우리 다시 보자.”
“응. 꼭 다시 보자.”
방문을 나가려던 지민이 돌아다보고는 설에게 말했다.
“설아.”
“응?”
“사랑해.”
설은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꾹 참으며 대답했다.
“나도 사랑해... 지민아...”
지민은 다시 설을 꽉 껴안은 후 방문을 열고 나갔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방 안이 고요해졌다.
처음부터 혼자였던 것처럼 지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순간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아주 오래 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지독한 꿈을 꿈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지민이 옆에 없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져 설은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다시 보자 약속했지만, 왠지 오늘이 마지막인 것 같아 목이 메도록 소리 내어 울었고 있는 힘껏 가슴을 쳐댔지만 한 번 미어진 가슴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설의 전화기가 울렸다. 도겸이었다.
“설아... 십 분이면 나 도착... 설아?”
“도겸아...”
설이 도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더 크게 울었다.
십 년이 넘도록 설의 옆을 지켰지만 이토록 크고도 서글프게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도겸은 넋이 나갔다.
그 순간 서지민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졌다.
“설아! 설아! 괜찮아? 혹시 기자들이 들이닥쳤어?”
“아냐... 빨리 와... 더는 여기에 못 있겠어...”
“곧 도착해. 조금만 기다려.”
“응.”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작가님... 저예요...”
펜션 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네... 들어오세요..”
펜션 주인이 방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왔다.
따뜻한 보리차를 설에게 주며 말했다.
“지민 씨가 나가면서 작가님 좀 들여다보라고 하더라고요... 아마 많이 울고 있을 거라고...”
설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런 설을 펜션 주인은 조용히 안아주었다.
“많이 아프죠? 곧 괜찮아질 거예요... 그리고 곧 다시 지민 씨와 만날 테니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펜션 주인의 따뜻한 말에 설은 조금씩 진정이 되고 있었다.
“작가님.”
“네...”
“삶이 힘들어져서 조금 휴식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언제든 돌아와도 좋아요...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그런 곳이 한 군데쯤 있어야 힘든 세상 견뎌낼 수 있을 테니...”
“고맙습니다...”
설의 전화가 다시 울렸다. 도겸이었다.
펜션 주인이 전화를 받아서 뒷문 쪽으로 들어오는 길을 도겸에게 알려주었고 이윽고 도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는 설이 펜션 주인의 품에 안겨있었고 서지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겸은 설의 얼굴을 보았다.
말간 얼굴에 빨갛게 변해버린 눈을 보자 도겸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지민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며 설의 짐을 챙겼다.
도겸이 짐을 정리하자 펜션 주인은 방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는 도겸과 설만 남게 되었고 왠지 모를 어색함이 방 안을 감쌌다.
짐을 다 정리하고 설에게 외투를 주었다.
설은 도겸이 건네준 외투를 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겸이 설을 살포시 안아주었다.
“설아... 많이 무서웠지? 늦어서 미안해... 얼른 가자. 연수가 기다리고 있어.”
도겸의 따뜻한 말에 설은 다시 울음을 터뜨렸고 서글피 우는 설을 도겸은 다독여 주었다
.
펜션 뒷문으로 나와 펜션 주인에게 그동안 감사하다는 짧은 인사를 하고 도겸이 준비해둔 차에 올라탔다.
펜션 정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펜션의 정원에도 불이 꺼져있어 밖에서 보면 문을 닫은 것처럼 보였다.
아마 펜션 주인의 배려였을 것이라고 설은 생각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션 앞에는 기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못해도 열 명은 넘어 보였다.
이내 시선을 거두어 설은 아오모리 거리를 쳐다보았다.
달리는 차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아오모리 시내를 빠져나가고 있었고 지민과 추억의 장소가 파노라마처럼 등 뒤로 멀어져 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길 위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었는데... 설은 지금 이 순간이 믿기지 않았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지민과의 모든 추억이 진짜 내가 꿈을 꾼 것이 아닐까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어쩌면 지민과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어 설은 양손을 꽉 잡았다.
그 순간 손가락에서 차가운 느낌이 나 설은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네 번째 손가락에 지민이 준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지민과의 추억도 지민과 함께한 시간도 그리고 지민과의 뜨거운 사랑도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민과 한 약속이 생각났다...
다시 아오모리에서 만나자는 약속이 떠올랐다.
설은 꼭 그 약속을 지키겠노라 다짐을 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