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자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녔다. 그러면 우리 집도 부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당시 우리 집은 그 부자 동네와 철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달동네. 하여 우리 학교에는 부자동네와 가난한 동네 아이들이 한 반에 골고루 섞여 있었다. 나는 부유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고 부모님은 늘 그것을 신경 쓰시면서 내가 기죽지 않게 하려고 애쓰셨다. 그리고 나는 그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모나지 않게 자라 성격 좋다는 소리 들어가며, 그리고 나름 공부 재주도 부리면서 꽤나 잘 성장했다. 나 스스로도, 부모님께도 늘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어느 날 친구가 생일 파티에 나를 초대했다. 나는 생일 파티를 여는 친구를 부러워했던 기억은 없고, 오히려 내 생일이 매년 방학 때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같은 반 다른 동네 친구의 생일 파티에 가는 일은 드문 일이었던 것 같은데, 그날 친구가 나를 생일에 초대한 것이다. 초대장을 받아 들었을 때 친구 생일 파티에 가는 긴장감 같은 것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함께 기억나는 한 남자아이의 목소리. 그리고 그 아이 이름도 기억나는 몇 안 되는 이름 중 하나가 됐다.
"야, 금이도 초대했어?!"
야 금이도 초대했어?
당시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아주 가벼이 넘겼다. 그 아이의 그 말에 생일 당사자인 친구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나와는 가깝게 지내던 친구였기에 그런 얘기를 했겠지.
그러나 그렇게 아무렇지 않았던 나는, 그날 이후 아주 자주 그 말을 듣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곤 한다.
얼굴은 벌게진 채로, 거울을 보고 내 몸에 냄새를 맡는다. 그 아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릴 때마다 나는 나를 살핀다. 그 목소리는 나에게 자격이 있냐고 묻는 소리이다.
너는 자격이 있어?
나는 나의 자격을 묻는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에게서 어떤 냄새가 나지는 않는지 지금 꼬락서니는 어떤지를 살핀다. 그러다가 혹 조금이라도 자신 없는 것이 발견되면 쓱 자리를 피한다. 나름 지금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 으스대기 시작한다. 지금 내가 얼마나 괜찮은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초등학생 시절 그날 내가 공부를 얼마나 잘하고, 생일인 친구와 얼마나 친하고 또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스스로 되뇌었던 것처럼. 그때는 그런 것이 자신감인 줄 알았다.
사람들이 나에게 직업이 뭐냐고 물을 때에도, 집이 어디냐고 물어도, 월급이 얼마인지를 물을 때에는 나는 나에게 자격이 있는지를 묻는 말로 여긴다. 이제는 내 아이들, 내 남편이 어쩌는가 하는 것도 나를 평가하는 말로 듣는다. 평가하려 드는 사람들로 그들을 평가한다. 그리고는 내가 얼마나 여유로운지, 얼마나 긍정적인지,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열변을 토한다. 만약 그 증명이 잘 안 됐다면 멀찌감치 도망가야지. 아니면 아예 자격이 없다고 실토하며 누군가 나를 추켜세워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거나.
그때 그 아이는 나에게 정말 자격을 물었을까? 어쩌면 그 아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엉뚱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랬다고 해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는 질문이었고 말투였다.)
누가 나의 삶을 평가할 수 있겠는가? 누가 당신을 감히 평가할 수 있는가?
심지어 객관적으로 점수가 몇 점이고 얼마의 능력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그를 평가할 수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구독자 5명의 아주 갈 길이 먼, 아마추어 브런치 작가라고 평가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의 평가이지 내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아닐 것이다.
나는 감히 평가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도 그저 그의 의견을 존중할 뿐이다. 누군가의 평가 앞에서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지 말기를. 스스로를 자꾸 증명하려던 삶에 마침표를.
당신 그대로가 참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