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별을 바라보며, 서로 다른 길 위에 선 철학자들
새해의 기쁨을 채 느낄 새도 없이, 나를 둘러싼 여러 현생의 일들로 연초부터 많은 고민과 불안 속에 지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마주한 상황과 내면의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있다고 인지하게 되었다. 어렵사리 내 마음을 비추는 작은 빛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싶었고 해결하고 싶었다. 도무지 혼자서는 쉽사리 해소할 수 없었던 악의 고리를 끊기 위해, 나는 철학을 택했다.
매주 가장 친한 친구 두 명과 독서모임을 한다. 각자의 삶이 다르고 고민도 다르지만, 그 시간만큼은 서로의 문장을 함께 읽고, 서로의 생각을 함께 들어준다. 얼마 전 내가 가져간 책은 『초역 : 부처의 말』였다. 고통조차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극복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라는 그의 말은 나에게 아주 시의적절한 위로가 되었다. *(그 시절의 나는 니체의 『위버멘쉬』라는 책을 읽고 있기도 했다.)
다른 한 친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생 수업』을 가져왔다. 덕이란 습관이고, 탁월함은 중용에서 비롯된다는 그의 메시지는 한편으로 니체의 사유와는 정반대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공통된 무엇인가를 느꼈다. 지향점은 같았던 것이다. ‘중심을 찾는 삶’, ‘균형 있는 인간됨’, ‘조화 속에서 흔들림을 다스리는 태도’.
처음 중용이라는 말의 의미를 들었을 때는 제법 오해했다. 균형이라는 단어에 담긴 어감이 어쩐지 무기력했기 때문이다. 이도 저도 아닌 회색지대,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적당주의처럼 느껴졌고, 때로는 체념과 포기, 양보라는 단어들과 함께 떠올랐다. 나는 그게 철학이 말하는 지혜인 줄 알았다. 그러니까, 너무 욕심내지 말고 조금은 포기하라는. 넘치지 않으려면 비워야 하고, 나아가려면 물러나야 한다는 어딘지 모르게 슬픈 균형 말이다.
하지만 중용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나 자신과의 대화 속에서, 그리고 독서모임의 끝없는 토론과 각자의 책 속에서 나는 점점 그것이 타협이 아닌 대응, 정지된 상태가 아닌 살아 있는 조율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중용은 중심을 잡는 일이다. 하지만 그 중심은 고정된 점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며 상황과 맥락 속에서 조정되어야 하는 중심이다. 그것은 외면의 균형이 아니라, 내면의 근육으로 잡아내는 균형이다.
니체의 초인은 고통을 찢고 나아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의 습관화를 강조했다. 불교는 집착을 놓아버림으로써 고요함에 이르라했고, 노자는 흐름에 몸을 맡기라 했다. 그들은 다 달랐지만, 사실 모두 같은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이 다르고 방식이 달라도, 결국 삶이라는 혼란 속에서 조화를 찾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모두 철학자였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함께 읽는 우리도, 누구보다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자기 삶을 읽어내려는 작은 철학자들이었다.
철학자들이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은 단순한 사유의 차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시대, 사회의 위기, 삶의 조건 속에 살았다. 니체는 무너진 도덕과 공허한 신념의 시대에 살았다. 그는 절망을 찢고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고, 그 안에서 자기만의 윤리를 창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출발점은 가치의 붕괴였고, 그의 수단은 초월적 의지, 그의 길은 해체와 재창조의 도약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과 교육, 제도가 살아 있는 시대의 시민이었다. 그는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이며, 반복을 통해 덕을 습관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출발점은 질서와 공동체였고, 그의 이동수단은 이성과 훈련, 경로는 탁월함을 향해 나아가는 ‘중용’의 삶이었다.
부처는 태어날 때부터 고통을 목격했다. 그는 그 고통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싶었고, 탐욕과 집착, 자아에 대한 착각이 괴로움의 뿌리임을 꿰뚫었다. 그의 출발점은 실존적 고통이었고, 그의 수단은 자각과 관조, 그의 길은 집착을 비워내는 해탈의 길이었다.
노자는 권위와 억압, 인위가 넘치는 시대의 사람이다. 무엇을 해도 더 얽히고 더 지치는 삶. 그는 거기서 물러섰다. 흐름을 따르고, 욕망을 줄이며, 자연과 하나 되는 무위의 삶을 택했다. 그의 출발점은 과잉된 통제였고, 그의 방식은 내려놓음, 경로는 비움과 흐름 속의 균형이었다.
그들을 보며, 철학은 이론이 아니라 각자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시작된 응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에 방법도 달랐고, 그들의 방법은 누구에게나 정답이 아니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단지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묻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출발점에 맞춰 나는 어떤 방향을 설정하고, 어떤 속도로, 어떤 방식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스스로 조정하고 대응하는 일이다.
균형은 고정된 점이 아니다. 그때그때의 나를 기준으로 움직이는 살아 있는 중심이다. 철학자들이 그랬듯, 우리도 각자의 리듬과 도구로 그 중심을 탐색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제 나는 안다. 중용을 추구한다는 것이 단순히 적당히 타협하거나, 슬프게 체념하는 일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균형과 조화는 정지된 평형이 아니다. 그것은 입체적이고 다층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늘 흔들리는 나를,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도록,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도록 조율하고 조정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나 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본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 이성에 갇히지 않기 위해 나를 객관화한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향한 눈도 잃지 않는다. 나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하되, 그 행동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닌, 나를 둘러싼 세상에 유익하고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고 바란다.
이것이 오늘의 내가 철학을 통해 깨달은 삶의 태도이다. 실천적이고 자아실현적인 삶. 균형이 목적지가 아니라, 매 순간 찾아가는 중심이라는 것을 유념하며, 나는 나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