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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삶은 라면, 가족을 잇는 맛있는 연결고리

꼬불꼬불 얽힌 저마다의 과거와 오늘의 현재를 아름답게 연결해주는 추억

by 루체

대구 수성못,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 진라면 순한 맛. 각기 다른 이 3가지 항목은 나에게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어릴 적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걷던 수성못 유원지는 그 시절 놀이공원에 가서 신나다 못해 하늘을 날아다니던 유치원생을 떠오르게 한다.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도 마찬가지이다. H.O.T., 젝스키스 등 내로라하는 1세대 아이돌 그룹들을 제치고 골든디스크 대상을 수상한 1998년 명곡. 어릴 적 어머니가 불러주며 처음으로 나에게 알려준 가요이다. 요즘에도 이 노래를 들을 때면 김종환 님의 목소리에 지난날 어머니가 불러주던 그 목소리가 덧입혀 들리는 것만 같다. 신입사원 시절 노래방 회식 때 동석한 선배님들의 연배(?)를 고려하여 이 노래를 자신 있게 불렀더니 어떻게 아냐며 예뻐해 주셨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진라면 순한 맛.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던 나와 동생에게 아주 딱 맞는 라면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신나고 특별했던 주말, 일요일에만 먹을 수 있었던 특식이자 행복이었다. 등교해야 했던 주중에는 그리도 무겁던 눈꺼풀이 주말엔 어찌 그리도 가볍던지. 새벽 6시부터 TV 앞에 자리 잡고 앉아 디즈니 만화동산에 온 정신을 집중한다. 그러다 아침도 점심도 아닌 11시 언저리면 부엌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라면 향에, 비로소 아침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체감하며 정신없이 브런치를 즐긴다.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고 집 앞 놀이터나 학교 운동장에 나가면 어김없이 친구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내 마음이 곧 카카오톡이었다. 별다른 연락 없이도 자연스레 그 시간, 그곳에서 뒹굴던 우리들. 그러다 해가 질 즈음이면 놀이터 저 멀리 저녁 먹어라 부르던 어머니 모습이 보인다. 아련했던 그날의 기억들은 라면이라는 친근한 음식으로 함축되어, 시공간을 초월하는 '포털'처럼 그때의 추억을 바로 지금 가져다준다.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가장 대중적인 음식을 몇 가지 꼽으라면 단연 빠질 수 없는 음식이 바로 라면일 것이다. 개인의 기호에 따라 물의 양과 면의 삶기를 조절하여 다양한 맛을 즐길 수도 있다. 시중에 유통되는 수많은 종류의 라면은 각각 저마다의 향과 맛을 가진다. 한 때 인기가 많았던 예능 "신서유기5"에서 강호동은 5가지 종류의 라면을 맛으로 구별하여 "라믈리에"에 등극하기도 한다. 이처럼 저렴한 가격이지만 다양한 취향을 존중하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라면이지만, 어떻게 끓여도 맛있는 종류의 라면이 있다. 바로 "추억이 담긴 라면"이다. 물이 적어 짜고 설익은 라면을 먹을 때면, 군생활 하던 날 새벽 불침번을 마치고 탕비실에서 동기와 끓여 먹던 뽀글이가 떠오른다. 물이 한강 마냥 넘쳐 싱겁고 퍼진 라면을 먹을 때면, 부모님의 가족모임과 함께 놀러 간 계곡에서 한 마리 리트리버마냥 물장구치다 점심 먹으러 오라는 어머니의 호령에 홀딱 젖은 채로 물 뚝뚝 흘러가며 푹 삶아진 라면을 먹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잘 끓인 라면은, 역시 일요일 아침 우리 가족의 브런치를 떠오르게 한다.

그 시절 대한민국은 IMF라는 광풍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우리 가족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의인지 타의인지 모를 새로운 자영업에 도전하는 시기를 마주하였고, 주부였던 어머니는 비어 가는 주머니 속 살림 걱정에 한숨이 늘어만 갔다. 30대가 되어서야,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한 번은 내 학급 동기의 학부형들이 갑작스레 우리 집에 방문하여 시간을 보낼 일이 있었다고 한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방문에, 집에 맥심 커피스틱 하나 없던 어머니는 주전부리를 마련하고자 부랴부랴 아파트 위층 이웃집으로 뛰어 올라가 3천 원을 꾸었다고 한다. 그 시절, 한 봉지에 450원 하던 라면은 나에게는 일요일 아침 특식이자 한 주의 낙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IMF발 풀죽이자 가족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작은 위로였고, 어머니에게는 한 주간 고된 일상으로 지친 주말 아침 늦잠을 허락해 주는 휴식, 쉼이었다. 라면은 우리 가족으로 하여금 각각 마주한 세상을 살아가며 필요로 했던 행복과 위로를 가져다주었다. 단순한 음식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라면은 추억이라는 공통의 맛으로 우리 가족에게 같은 향의 행복을 가져다주고 있다.


추억은 단순한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한다. 그 시절 라면으부터 위로받고 행복해하던 가족이 과연 비단 우리 가족뿐일까. 지금의 나, 지금의 우리 가족, 뿐만 아니라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모두의 기억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라면. 지치고 힘들었던 우리를 다시 일으켰던 것은 그 라면 한 봉지였음을, 소소하고 작은 하루하루와 일상이 쌓여 지금의 내가 있음을 문득 또 새로이 느낀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별거 아니지만 행복하게 살아가야겠다 다짐하며 미래의 나, 미래의 우리 가족, 아름다울 그때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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